
서양인의 시선으로 본 1920~1930년대 한국 복식문화 : 아일린 커리어(Eileen Currier) 기증자료를 중심으로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Korean costume culture in the 1920–1930s based on the Eileen Currier Archive Collection at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The collection consists of 512 items related to Korea, collected and preserved by Kathleen Smith Gorman (1894-1992) who lived in Seoul from 1921 to 1940, and later donated by her daughter, Eileen Reeve Currier (1926-2024). Photographs and manuscripts (Colour and Contrast in Korea and Kamapsamneda), collected or written by Gorman, form the basis of the research. Unlike previous studies that compile various foreign records, this study analyzes consistent observations by a single individual to examine costume structure, colors, and wearing contexts. The materials mainly depict individuals in traditional Korean clothing, with examples where Western elements such as vests, hats and shoes were incorporated, highlighting the transitional costume culture of the modern period. Gorman’s records reflect both an outsider’s view and that of a long-term resident, illustrating how hanbok symbolizes Korea. White clothing, wedding attire, and children’s festive costumes illustrate contemporary costume practices. This study provides a foundational basis for understanding Korean costume culture in the 1920-1930s from an integrated foreign perspective.
Keywords:
Eileen Currier, Hanbok, Japanese colonial period, Kathleen Gorman, modern costume, western perspective키워드:
아일린 커리어, 한복, 일제강점기, 캐슬린 고먼, 근대 복식, 외국인 시선Ⅰ. 서론
1. 연구 목적
20세기 초는 전통과 서양 의복이 공존하며, 새로운 복식 착용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이다. 이 시기 한국 복식을 관찰한 서양인의 기록은, 개항 이후 변화하는 복식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되어왔다.
선행 연구는 주로 187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를 다루며, 외국인의 시선에 포착된 복식의 형태와 문화적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했다. Lee(2000)는 사진과 삽화, 여행기를 활용해 1876~1910년 조선의 복식과 세탁 문화를 살폈고, Lee(2005)는 한말 외국인 외교관, 학자, 여행가, 의사, 군인, 선교사 등의 저서를 분석해 머리장식, 의복, 신발 등 복식 요소에 대한 인식을 정리했다. 이후 연구(Lee, 2008)는 문헌과 삽화를 분석하며 서양인의 시선을 입체적으로 조명했고, Jung(2013)은 선교사들의 저술에서 복식에 대한 종교적·문화적 해석을 추출했다. Hwang(2020)은 개항기 서양인의 복식 인식을 국가별·방문 목적별로 유형화하고, 공통 관심 요소를 도출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개항기 복식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했다. 그러나 대부분 다수의 저서나 삽화 자료에 기반하고 있어, 일관된 기록자의 관찰 조건이나 사회적 배경을 분석한 사례는 드물다. 이는 외부 시선의 신뢰성과 기록 방식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본고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아일린 커리어(Eileen Currier) 기증 아카이브 자료를 중심으로, 1920~1930년대 민간 복식을 바라본 외국인의 시선과 그 기록 방식을 살펴본다. 이 자료는 서울에 거주한 캐나다인 캐슬린 고먼(Kathleen Gorman)이 남긴 사진과 문헌 등으로 구성된다. 기록에는 복식의 실제 모습과 외부인의 해석이 각각 시각과 서술로 나타난다.
기존 연구는 대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관찰자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다. 이에 비해 본 자료는 특정 시기를 배경으로, 동일 인물이 수집하고 정리한 점에서 관찰 조건과 해석 방식의 일관성을 지닌다. 캐슬린은 서울의 외국인 사회 내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음악교사였다. 그녀의 관찰은 주로 거리의 행인, 시장의 상인, 가정의 고용인 등 일상적 접점에서 이루어졌으며,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이들이 주를 이룬다.
본 연구는 1920~1930년대 서울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외국인의 시선에서 재현된 민간 복식의 구체적 양상과 기록 방식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앞서 2024년 국립민속박물관 민속 아카이브 자료집 『세브란스 베이비, 아일린 고먼: 100년 전 고먼 가족의 서울살이』 발간 과정에서 기증자료를 선행 검토하고, 「〈다채로운 나라, 한국〉으로 본 1920~1930년대 한국」 논고를 통해 문헌 속 생활문화 전반의 서술 구조를 분석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복식 관련 내용을 독립적으로 심화하고, 외국인의 시선 속 복식 재현 양상과 인식 구조, 그리고 해당 기증자료에 나타나는 복식 기록의 방식과 특징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연구자료 소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아일린 커리어 아카이브 기증자료는 기증자 아일린 커리어(Eileen Reeve Currier, 1926~2024) 여사의 어머니 캐슬린 고먼(Kathleen Smith Gorman, 1894~1992)이 생애 전반에 걸쳐 수집·보관했던 한국 관련 기록물 512점이다. 자료는 사진, 원고, 인쇄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20~1930년대 국내 외국인 사회의 모습과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캐슬린은 캐나다 출신 음악 교사로,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서울에 거주하며 한국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는 캐나다 마운트 앨리슨 대학교(Mount Allison University)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일본 고베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남편 아서 고먼(Arthur Gorman, 1889~1929)을 만나 결혼했다. 아서는 일본 요코하마 출신의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1910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mpany) 한국·만주지사에 근무했다. 캐슬린은 1921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해 죽첨정 2정목 190번지(현재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가정을 이뤘다. 이후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사로 활동하며 윤치호의 아들 윤기선, 사이토 마코토의 조카 하루 시모이자카 등 조선·일본 고위층 자녀와 재한 외국인 2세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했다. 1929년 남편이 사망한 뒤에는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 나갔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에 캐나다로 귀국했다.
캐슬린과 고먼 가족이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직접 수집·촬영한 사진은 총 365점이다. 사진자료는 크게 가족사진, 서양인 커뮤니티 등 외국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과 한국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 두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촬영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만주·압록강 일대, 원산, 화진포 등지에 걸쳐 있으나, 대부분은 고먼 가족이 거주한 서울에서 촬영한 것이다. 한국을 피사체로 한 사진에는 국왕 장례 행렬, 민간 의례, 민가와 경작지, 도시의 풍경 등 다양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의례복과 일상복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거리와 시장 사진은 당대 건축물과 민중의 모습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글은 Colour and Contrast in Korea와 Kamapsamneda가 있다. 전자는 필자 캐슬린의 회고글로, 1950년대에 캐나다에서 작성하기 시작하여 1988년까지 추가·보완했다. 이 글의 실제 발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초고와 정본이 함께 보관되어 있고, 원고 상단에 수신인과 발신인의 주소가 기재된 머릿글(letterhead)이 있던 점에 비추어, 당초 기고목적으로 쓴 글로 보인다. 글의 내용은 한국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소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사회·풍속·복식·의례·기후·도시·여성의 삶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이 중 복식 관련 서술은 원문 전체 분량(약 5,000자)의 6~7%를 차지한다. 후자는 고먼 가족의 한국 체류 중 일화를 서술한 글로, 1930년대 세시풍속과 생활문화에 대한 단편적 내용을 포함한다.
본 연구는 이 두 편의 원고와 더불어, 사진자료를 병행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연구의 내용은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와 의례적 양상을 살펴보고, 외국인 기록의 맥락과 해석 방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Ⅱ.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 나타난 복식 종류와 양상
개항 이후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지식인과 관료층을 중심으로 서양복 착용이 확산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서양복을 입는 모습이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 기본 복식은 여전히 전통 의복이 주류를 이루었다. 저고리와 치마, 바지를 중심으로 한 옷차림은 한국인 대부분의 평상복이었다. 때로는 이를 개량하거나 서양복 요소를 차용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항 이후 유행한 조끼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920~1930년대는 전통 복식과 서양 복식이 혼재하는 과도기적 시기로, 이중 복식 체제의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증자료는 복식문화의 다층적 구성을 사진과 문헌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담아낸다. 사진에는 서양복과 전통복이 혼재된 거리 풍경이 다수 등장하며,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복식이 사실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노인,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은 일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 등 전통과 변화가 교차하는 서울의 일상이 사진 속에 담겨 있다.
한편, 캐슬린 고먼이 남긴 글에는 당시 한국인의 복식을 ‘이국적 전통’으로 재현하려는 서양인의 시각 또한 반영되어 있다. 다음은 그녀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1920년대 서울의 거리 풍경이다.
In the days of the 1920’s, if one stood by the old Bell Tower at Chong no, the center of Seoul, the capital of Korea, one needed little imagination to feel himself transported back thousands of years to scenes from biblical times. There were the old men in their top hats, long robes, and Turkish trousers, moving with slow dignity; there were women, some with babies on their backs, others with great burdens on their heads, many with both, carrying themselves with statuesque grace.
(Gorman, n.d.-a)
이와 같은 묘사는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 전통 복식의 외형적 특징과 거리 풍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본 장에서는 사진과 원고를 중심으로 1920~1930년대 한국인의 복식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단, 구체적인 사례나 색상 추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개항 이후 서양인의 저서나 삽화를 일부 참고했다.
1. 의복
기증자료에 등장하는 한국인 남성들은 주로 바지·저고리를 기본 복식으로 하며, 그 위에 두루마기나 조끼를 덧입는 모습이 확인된다. 캐슬린의 글 Colour and Contrast in Korea에서는 외국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고리를 “jacket”, 두루마기를 “coat” 또는 “robe”, 바지를 “trousers”로 번역해 표기했다. 특히 한국인들의 폭이 넓은 바지를 설명할 때는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인 “터키 바지(Turkish trousers)”를 차용했고, 저고리는 “오른쪽으로 묶어 입는 짧은 재킷(A short jacket tied at the right side)”으로 묘사하며, 우임(右襟) 구조를 언급했다.
The costume is quaint. A short jacket tied at the right side, and huge baggy trousers drawn in with a tie at the ankle for the man.
(Gorman, n.d.-a)
전통사회에서 남성의 외출복은 관모(冠帽)를 착용하고 겉옷인 포(袍)를 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항 이후에도 외출복의 기본 형식인 ‘포와 모자’의 조합은 유지되었지만, 관모 대신 서양식 모자가 등장하는 등 구성의 양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갑신의제개혁(1884), 갑오개혁(1894), 을미개혁(1895)을 차례로 거치면서 의복은 활동성과 편의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간소화되었다. 조선시대 다양한 포의 종류는 착수(窄袖) 주의(周衣)로 일원화되었다. 특히 흑색 두루마기는 신분에 관계없이 착용하는 일반적인 겉옷으로 정착했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1921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두루마기가 “항상 몸에 휘감기고, 몸을 조금만 굽혀도 앞자락이 땅에 끌리는 구조”라며, 활동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Dong-a Ilbo [東亞日報], 1921). 동시에 “좀 자르고 간편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로 압니다”라고 언급하는 등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 두루마기 역시 실용성을 중심으로 개량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두루마기의 길이나 형태에도 점진적인 변화가 뒤따랐을 가능성을 포함한다.
캐슬린은 서울의 옛 거리 풍경을 묘사하며 “모자를 쓰고 긴 가운과 터키 바지를 입은 노인들이 천천히 품위 있는 모습으로 움직인다(There were the old men in their top hats, long robes, and Turkish trousers, moving with slow dignity)”고 서술했다. 이 표현은 각각 갓(top hats)과 두루마기(long robes), 폭이 넓은 바지(Turkish trousers)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기증자료의 거리 사진에서도, 외출복으로 포를 착용한 남성들의 모습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Fig 1>. 이들이 입고 있는 두루마기는 대체로 소색(素色)의 흰색 계열이며, 일부는 흑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길이는 발목 위 혹은 정강이 중간 정도에 이르며, 소매의 폭은 좁다.
개항 이후에는 서양 복식의 영향으로 저고리 위에 조끼를 덧입는 양상이 나타났다<Fig. 2>. 조끼는 고름 대신 단추를 여밈에 사용하고, 주머니를 갖추어 실용성을 강조했다. 조끼의 간편함과 기능성 덕분에 일상복으로 빠르게 정착했다.
조선 후기 여성 저고리의 길이는 점차 짧아져 19세기에는 약 20cm 안팎에 이르렀다. 일부는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졌으며, 이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서양인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Hwang, 2020, p.67).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성 복식 또한 활동성과 실용성을 고려한 방향으로 변화했다. 저고리는 다시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반대로 치마는 짧아졌다. 1920년대에는 긴 저고리와 짧은 저고리가 병행되었는데, 지식인 계층은 긴 저고리를, 일반 부녀자들은 짧은 저고리를 착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학생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활동성을 고려해 통치마를 착용하고 치마 길이를 줄이는 경우가 늘어났다(Modern Fashion 100 Years Compilation Committee, 2002, p.100). 치마를 착용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한복 치마는 가슴을 조여 묶는 구조로, 건강에 해롭고 활동에도 제약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여학교에 재직하던 외국인 교사들은 조끼허리가 달린 치마를 도입했다. 치마를 어깨에서 메는 방식이 가능해지면서 활동성과 착용 편의성이 향상되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주로 여학생이나 신여성층에 국한되었으며, 일반 서민 여성의 복식에는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 복식의 건강·위생상의 문제는 당대 언론에서도 공론화되었다. 1921년 “衣服制度改良은 먼저 부인의 가슴을 매지 안토록 주의하야 개량함이 조흘 듯 하다” 기사에서는 기존 여성 복식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가슴을 단단히 매는 구조”를 지적했다(Dong-a Ilbo [東亞日報], 1921). 활동성 저해, 체형 변형, 보행 시 복식이 흘러내려 가슴이 드러나는 점 등을 문제로 언급하며, “어깨에 메고 허리에 두르는 방식”으로의 개편 필요성을 제기했다.
<Fig. 3>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사이, 한국인 가정주부의 일상적 복장을 보여준다. 사진 속 여성은 소매가 좁은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으며, 거들치마의 허리 중간은 끈으로 묶어 길이를 조절했다. 전통적 복식을 착용한 서민 여성의 일상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Fig. 4>는 1930년대에 캐슬린이 이화여전 피아노과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여학생들은 흰색 통치마와 저고리를 착용하고 있다. 여학생들의 저고리 길이는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손목 상단에 이른다.
캐슬린은 이전 시기의 서양인들과 달리 여성 복식의 노출성에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으며, 여성들이 남성과 유사한 형태의 상의를 착용한다고만 언급했다. 치마에 대해서는 “겨드랑이 아래 몸을 단단히 감싸는 띠를 두른 주름진 긴 치마를 입는다”고 서술했으며, 추운 날씨에는 남녀 모두 겉옷으로 긴 외투를 착용한다고도 덧붙여 여성의 두루마기 착용 또한 확인할 수 있다.
The same for the woman with the addition of a long full skirt which is pleated into a band wrapped tightly around the body under the armpits. Over this for both sexes in cold weather is worn a long top coat or robe.
(Gorman, n.d.-a)
1920~1930년대 서울에서는 백의(白衣) 중심의 전통 복식이 여전히 보편적이었지만, 아동복에서는 이와 다른 색채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아동복은 바지·저고리 또는 치마·저고리 구성의 성인 한복을 축소한 형태였으나, 색상 면에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설날이나 초파일과 같은 명절에는 선홍, 노랑, 주홍, 보라, 분홍 등 강렬한 색상으로 꾸며진 아이들의 복식이 거리 풍경 속에서 뚜렷한 시각적 대비를 이루었다.
캐슬린은 자신의 회고에서, 명절마다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거리로 나서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이를 “활기찬 색채의 만화경 같은 풍경(kaleidoscopic scene of animated colour)”이라 표현하며, 아이들의 복장이 성인복과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색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언급했다.
Like adorable miniature men and women, the children’s costumes are replicas of their elders, except for color. Dear to the Korean eye are blinding shades of cerise, yellow green, scarlet, purple, pink and orange, and these are let loose when the Korean mother makes the new garments for her children to wear on New Years, or Buddha’s Birthday.
(Gorman, n.d.-a)
Korea goes by the old Chinese or lunar calendar, and when New Years came around (usually in early February) we always made it a point to take a drive or walk around the city. The Korean fathers would proudly lead their children out in their new and dazzling clothes, and the streets presented a kaleidoscopic scene of animated colour.
(Gorman, n.d.-b)
Kamapsamneda에는 설날 아침, 하인의 자녀들이 새 옷을 입고 인사를 오던 장면이 서술되어 있다. 설날이면 아이들은 원색의 다채로운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성인과 대비를 이루었다.
They all wore bright colored garments and as they stood in a row it reminded one of a paint box, but your paint box, Kathie, would never have all the startling cerises, orange, yellow, strong pinks, greens, purples and reds which we saw that day. The little girls’ costume was a long pleated skirt that was wrapped around and tied tightly under her arms (exactly like her Mothers’). The little boys wore great balloon like trousers tied in at the ankle, and also wrapped and secured around the waist, with a short jacket tied at one side. This also was exactly like their Fathers’. Each garment was a different color and as the streets were full of children on New Years Day you can imagine what an interesting sight it was, to see all the colors moving and hopping about.
(Gorman, n.d.-b)
색동옷은 아동복의 색채상징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복식 형태이다. 색동은 청(靑)·적(赤)·황(黃)·백(白)·흑(黑) 오방색(五方色)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오행 사상과 연결된다. 이는 벽사(辟邪)와 길상(吉祥), 무병장수의 의미를 담은 상징으로 작동하여, 아이의 복을 비는 의례적 복식으로 기능했다. 특히 색동은 돌복에서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첫돌 의례는 아이의 생존과 성장을 축원하는 중요한 의례였으며, 색동 돌복은 이 같은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복식이었다. 색동은 돌잡이와 같은 의례적 행위와 함께 가족과 공동체의 기대가 응축된 상징체계로 작용한다. 이처럼 아동복의 색채는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특정한 시간성과 의례 구조 안에서 사회적 의미를 지닌 장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렬한 원색의 설빔 역시 단순 의복이 아니라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실천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 중 한국인 아이들을 촬영한 사진은 3점에 불과해 복식의 색채 구성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사진에서는 바지·치마·저고리 등 성인 의복과 동일한 아동복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제 막 관례를 치른 것으로 보이는 소년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Fig. 5, 6>.
문헌자료에서는 아동 복식의 색채와 구조, 명절과 설빔에 대한 서술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난다. 구체적인 색상 표현, 명절날 거리의 풍경 등은 사진자료로는 포착하기 힘든 당대 아동복의 사회적 맥락과 시각적 인상을 보완해준다.
의례복에서는 상복(喪服)과 혼례복(婚禮服)에 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개항 이후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한국인의 백의 풍습에 주목했다. 외국인들은 이를 ‘흰색의 물결’, ‘흰색 왕국’ 등으로 표현하며, 한국인의 복식을 특징짓는 대표 요소로 인식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내한 외국인 알렌(H. N. Allen)의 『조선 견문기(Things Korean)』, 새비지 랜도어(A. H. Savage-Landor)의『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이자벨라 비숍(I. B. Bishop)의『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등에는 백의에 관한 언급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Kang & Chun, 2021, p. 3). 이들의 시선은 각기 달랐지만, 대체로 한국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흰옷 착용을 민족적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 모두가 흰옷을 입는 관습은 서양인의 눈에 낯설고도 독특한 풍경으로 비쳤다. 한국인들에게 백의는 일상복인 동시에 상장례복(喪葬禮服)이었다. 20세기 초 조선 왕실 국장에서 흰 상복을 입은 조문객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메운 장면은 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백의가 공동체의 감정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캐슬린 고먼은 1921년 고종황제의 부묘(祔廟) 예행행렬[習儀]을 직접 목격하며, 당시 서울의 거리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고 회고했다. 1919년 고종의 승하부터 1926년 순종의 장례까지 대규모 조문 행렬에서 백의는 집단적 애도의 장면을 형성했으며, 외국인들은 이를 인상 깊게 기록으로 남겼다. 동시기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제임스 모리스는 국장 관련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도 백의의 상징성을 더욱 강화했다. 외국인들은 흰옷에서 ‘애도의 색(mourning color)’이라는 의미를 읽어냈다(Hwang, 2020, p. 111).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과 흰옷의 조합은 상실과 슬픔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도 당시 장례 장면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Fig. 7>과 <Fig. 8>에는 각각 고종과 순종의 영여(靈轝)를 운반하는 여사꾼[轝使軍]들이 백색의 건과 제복을 착용[屈巾祭服]하고 등장하여, 조문객뿐만 아니라 장례를 수행하는 인물들의 복식까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자료를 제공한다. 고종 부묘일 행렬을 촬영한 사진에 대해서는 “짐 모리스가 촬영한 1921년 대한제국의 황제 이씨(1919년 사망)의 장례식 사진. 서울 경복궁에서 동문 밖 9마일 거리에 있는 왕릉까지 가는 행렬이다(Historical pictures(taken by Uncle Jim Morris) of the Funereal of the last emperor Yi of Korea 1921(died in 1919) Procession from north palace, Seoul, to the King's Tomb's, nine miles outside the east gate)”라고 설명했다.
The magnificent palanquin was carried on the shoulders of thousands of men, and the funeral song rose in unison from as many voices. Other palanquins bore Royal tablets and relics, and others bore huge grotesque images and effigies designated to scare away the evil spirits. The entire landscape was white with the assembled population music.
(Gorman, n.d.-a)
백의의 흰색은 표백된 백색이 아니라, 무명·명주·모시·삼베와 같은 전통 직물을 염색하지 않은 소색을 의미한다. 인공 염료 발명으로 유색 복장이 보편화된 근대 서구 사회와 달리, 무채색 중심의 복식이 일상화되어 있는 조선의 모습은 외국인에게 더욱 이질적인 풍경으로 비쳤을 것이다. 1920~1930년대는 일제가 전통 복식을 통제하고 색복(色服)을 장려한 시기였다. 1895년부터 을미개혁을 통해 공사복(公私服)을 검정 두루마기로 통일했으며, 통상예복(通常禮服)으로 흑색 주의를 지정했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 정부 차원에서 흰옷 대신 흑의 착용을 권장했으나, 을사늑약에 대한 반발과 시위가 격화되면서 백의 착용은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더욱 확산되었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백의를 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백의가 일상복으로 널리 유지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 상징성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리 풍경과 생활 장면을 담은 다수의 사진 속 인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백의를 착용하고 있으며, 이는 백의가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일반적인 복장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캐슬린 또한 원고에서 “한국의 전통 의상은 흰색”이라 언급하며, 백의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복식 관습임을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한국인들이 흰색의 비실용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점차 다른 색상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50년대 이후의 시점에서 백의가 더 이상 일상 복식으로서 보편성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he traditional costume of Korea is white, owing to the fact that, white being worn for mourning in the Orient, the Koreans at one time in their history, had for such prolonged periods to wear white in national mourning, that it came to be adopted permanently. The modern trend is toward other colours, as the Korean sees the impracticability of white.
(Gorman, n.d.-a)
흰옷을 고수하는 복식문화는 세탁 방식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프랑스 외교관 뒤크로(Georges Ducrocq)는 한국을 “거대한 세탁소(grande blanchisserie)”에 비유하며, 흰옷을 고집하는 남성들로 인해 여성들이 ‘빨래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Hwang, 2020, pp. 111–112). 서양인들이 백의 세탁문화를 위생이나 노동력 낭비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한 것과 달리, 캐슬린의 기록은 평가 없이 관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여성들이 산비탈 옆 개울가에서 평평한 돌 위에 옷을 놓고 납작한 막대기로 두드리며 세탁하는 장면을 기록했고, 해당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한국의 빨래(Korean Laundry)”라는 간단한 설명만을 덧붙였다<Fig. 9>.
How female Korea does the washing of the white clothes, squatting beside on outdoor stream near a sunny hillside, pounding the garment with a flat stick upon a flat stone.
(Gorman, n.d.-a)
한국의 전통 혼례 역시 외국인의 눈에 이국적인 의례로 비추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매를 통한 배우자 결정, 당사자의 자율적 선택보다 가족과 공동체의 결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예단과 의례 절차 등은 서구의 개인주의적 결혼 문화와 차이를 보였고, 혼례복 또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시각적 차이를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신부가 착용한 원삼(圓衫)과 족두리, 신랑의 사모관대(紗帽冠帶)는 일상복과는 차별화된 색상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외부인들의 눈에 띄는 풍습이었을 것이다.
Colour and Contrast in Korea에서도 혼례 관련 서술이 등장하지만, 중점은 혼례 절차보다는 중매 문화에 놓여 있다. 캐슬린은 중매인을 “원로(elders)”, “천문학자(astronomy scholars)”, “현자(wise men)” 등으로 표현하며, 당시 일반적인 서양인의 시선과 달리 비교적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당일까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점, 신부의 눈을 가리는 풍습, 예단 문화 등에 대해서도 간략히 서술하고 있으나, 혼례복 자체에 대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원고는 혼례 현장의 직접적인 관찰기라기보다는 당시 혼례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적 설명에 가까우며, 외국인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기능한다.
Following the dictates of ancient custom, young people do not choose each other in marriage, in Korea. To our ideas of love and romance this seems hard and despotic but to the Korean, our custom is unwise and uncultured. Do not their elders, astronomy scholars, wise men, and the “go between” whose business it is to study every factory employing astronomy, etc., of this important matter, have infinitely more wisdom than inexperienced youth? The “go between” makes all arrangements (for a price!) gifts are exchanged, contracts signed and the date is set. The bride and groom do not see each other until after the wedding festivities are over. The bride’s eyes are sealed shut during the three days of the marriage ceremony, which consists of various formalities, bowing, drinking a marriage wine, feasting and reveling. Brides materials enough for 60 yrs “Hangup” at 60 (honorable) gift of cloth to last until end of life.
(Gorman, n.d.-a)
혼례복에 대한 단서는 혼례 장면을 촬영한 사진 <Fig. 1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 민간 서민층의 혼례로, 기존 복식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은 새로운 시각자료이다. 신부의 혼례복과 더불어 병풍, 상차림, 하객의 모습을 담고 있어 20세기 초 전통 혼례의 일례를 제시한다.
사진 속 신부는 원삼을 입고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있다. 원삼은 본래 궁중 의례복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 민간 혼례에서도 착용했다. 특히 녹색 원삼은 공주의 예복에서 유래하여 신부복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원삼은 섶이 없는 맞깃 구조로, 길이는 무릎을 덮는 정도이며, 넓은 소매 끝에는 색동과 백색의 한삼(汗衫)이 덧붙는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사진 속 신부의 외형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Old Korea』와 〈신부(The Bide, 1938)〉에서 묘사한 전통 혼례 장면과도 유사하다. 혼례복으로는 색동 소매가 달린 녹원삼을 착용하고 있다<Fig. 11>. 이 그림은 기증자료에 포함된 혼례 사진과 함께, 당대 흑백사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혼례복의 색상이나 형식을 유추할 수 있는 보완적 시각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전통 혼례복은 색상과 구성에서 일상복과 분명히 구별되는 복식이다. 기증자료에서는 이를 착용한 인물을 담은 사진 1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문헌과 시각 자료 모두 제한적이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단서로 기능하며, 외국인의 시선을 통해 당대 서민 계층 혼례복의 형태 및 형식을 간접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2. 모자와 상투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옷차림을 언급할 때 모자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을 “모자의 나라” 또는 “상투의 나라”로 표현하며, 다양한 모자와 머리모양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선시대 모자는 일상적 쓰개일 뿐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복식 요소였다. 특히 관모와 갓은 특정한 계층을 식별하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작용했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 이후 1910년대에는 상투를 자르는 것이 일반화하면서, 전통적인 갓 착용이 줄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발과 더불어 서양식 모자의 도입이 본격화되었고, 갓 대신 중절모, 중산모, 맥고모자, 학도모 등 용도와 계절에 따른 서양식 모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문 광고에는 다양한 모자의 삽화·사진·가격 등이 게재되며, 모자를 손질하는 법, 유행하는 모자의 형태, 가격 변화 등이 실린 기사도 종종 등장했다(Kim, 2007, p. 69). 이와 같은 변화는 한복과 서양 복식 요소의 혼용이라는 새로운 복식문화를 형성했다. 1919년 고종 국상 당시 상복으로 백립 대신 파나마 모자를 착용했던 것을 그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캐슬린의 기록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갓을 서양의 ‘탑햇(top hat)’에 비유하며, “턱 아래에서 구슬로 고정하는 우스꽝스러운 말총 모자”라고 묘사했다. 또한 이 모자는 종종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고 덧붙였다. 캐슬린은 갓을 “한 세대 전 자존심이 강한 남성들의 모자”로 설명하면서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 복식 요소로 인식했다. 동시에 길게 땋아 상투를 틀어 올린 남성의 머리 역시 갓과 함께 사라진 풍속임을 언급했다.
There is a ridiculous little crinoline top hat which ties under the chin with beads, for the self respecting man. Until a generation ago, the man twisted his long hair or pigtail braid into a top knot, which, more or less, held this intriguing hat in place. It was often askew, however, and its rakish angle belied the dignity of its wearer.
(Gorman, n.d.-a)
사진자료는 당대 모자 착용 양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Fig. 12>는 1922년 서대문 거리에서 바둑을 두는 한국인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두루마기를 입은 남성들이 갓과 서양식 모자를 착용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 중 갓을 쓴 인물은 한 명뿐이며, 나머지는 오늘날 ‘사냥모자(hunting cap)’로 익숙한 조타모자(鳥打帽子)를 착용하고 있다. 조타모자는 당시 ‘도리우찌(とりうち) 모자’로 불리며, 1930년 전후 크게 유행했다(Kim, 2007, p. 63).
고종대 이후 갓의 모체 높이는 낮아지고 양태는 좁아졌는데, 해당 사진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반영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한복과 함께 중절모나 맥고모자 등을 착용한 혼용 복식의 사례도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자의 형태와 종류는 시대의 변화뿐 아니라 장소와 계절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Fig. 13>은 혜화문 시전의 풍경으로, 삿갓을 쓴 남성의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삿갓은 갈대나 대를 엮어 만든 원추형의 모자로,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 용도였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사진 속 인물 역시 일터에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삿갓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겨울철 한강에서의 채빙 작업을 하는 장면을 담은 <Fig. 17>에는 일꾼들이 남바위나 털모자 등 방한용 모자를 착용한 모습이 나타난다.
3. 장신구
1920~1930년대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특정 기념품이 인기를 끌었다. 캐슬린의 기록에 따르면 신송(Sinn Song)의 골동품 가게에서는 기념품으로 담뱃대, 모자, 호박 구슬 끈, 장(欌) 등을 판매했다. 신송은 외국인 수집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고미술품을 중개하던 인물로, 외국인들은 그의 상품을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받아들였다.
The proverbial tourist, in the old days of the 1920’s and 30’s used to see Korea from the windows of the comfortable South Manchurian railway trains. He would spend a day in Seoul, making a breathless tour of old temples, palaces and curio shops. Quite likely he was guided by Sinn Song, the irrepressible curio dealer who eventually led him to his musty but fascinating shop. There the susceptible tourist fell an easy prey, and soon became the joyous possessor of the long pipe and top hat peculiar to the Korean man, a string of amber beads or a priceless old chang (chest) trimmed with finely carved brass or wrought iron all made by hand.
(Gorman, n.d.-a)
기록에 등장하는 “호박 구슬 끈(a string of amber beads)”은 주영(珠纓)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영은 턱밑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구슬 갓끈으로, 조선시대 남성들의 신분과 재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호박·대모·자수정 등 화려한 재료와 색채의 주영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호박으로 만든 것이 인기 있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 거주했던 메리 테일러(Mary Taylor)는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에게서 호박 구슬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결혼 선물로 받아 오랫동안 간직하기도 했다. 당시 외국인에게 갓끈의 용도나 문화적 맥락은 다소 생소했을지라도, 그것이 귀중한 물건이자 한국을 상징하는 기념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긴 담뱃대 또한 서양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복식 소품 중 하나였다. 장죽(長竹)에 담배를 피우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으로 여겨졌으며, 사진 촬영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Fig. 14>. 캐슬린은 글과 사진에서 담배를 언급하며, 이를 한국을 대표하는 장신구의 일환으로 보았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노인의 사진<Fig. 15>은 고먼 가족과 교류하던 재한 캐나다인 제임스 모리스(James Morris)가 촬영한 것으로, 외국인 지인들을 위한 선물용으로 다수 인화되었다.
캐슬린의 기록에 따르면, 담뱃대는 짧게는 15인치(38cm), 길게는 3-4피트(1m)에 이르렀다. 따라서 담뱃불을 붙이거나 담배를 보관할 때에 하인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담뱃대는 사용하지 않을 때 등과 옷 사이에 끼워 넣거나, 모자나 귀에 꽂아 휴대했다. 필자는 특히 담뱃대의 길이가 신분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관찰은 단순한 물품에 대한 흥미를 넘어,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외국인들은 담뱃대를 단순한 소지품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사회 구조와 상징 질서를 반영하는 문화적 요소로 인식하며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Not the least among the Korean man’s accessories is his long pipe, which varies in length from fifteen inches to three or four feet according to his station in life. Many of the pipes require a servant to light them, and as the tiny bowl holds only sufficient tobacco for three or four puffs, the servant is kept busy! The ordinary man tucks this pipe down his neck, between his back and his clothes, when not in use, and it protrudes above his ears or his hat, as part of his outfit, together with his oiled paper fan in hot weather.
(Gorman, n.d.-a)
4. 신발
한국의 전통 신발에는 혜(鞋), 화(靴), 짚신, 미투리, 나막신 등이 있다. 개항 이후 서양 복식의 영향으로 양말과 구두가 도입되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짚신과 나막신이 널리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는 짚신과 미투리의 형태를 본뜬 고무신이 등장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전 계층에 걸쳐 보편화되었다(Modern Fashion 100 Years Compilation Committee, 2002, p. 80). 고무신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으며, 실용성이 뛰어나 대중적으로 선호되었다. 특히 흰색 고무신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1920년대는 양말과 스타킹이 일반에 보급되면서, 구두 착용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 펌프스(pumps)와 샌들(sandals) 등의 구두가 등장하며 여성용 신발의 양식이 다양해졌다. 1930년대 캐슬린 고먼과 이화여전 제자들의 사진<Fig. 4> 속 학생들의 짧은 통치마 아래로도 서양식 구두가 드러난다.
남성의 경우, 구두는 양복보다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실용성 면에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Modern Fashion 100 Years Compilation Committee, 2002, p. 80). <Fig. 16>에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구두를 착용한 남성의 모습이 담겨 있어, 전통 복식과 서양식 신발의 혼용 사례를 보여준다.
한편, 노동 현장에서는 여전히 전통 신발을 착용했다. <Fig. 17>은 한강에서 채빙을 하는 장면으로, 한국인 일꾼들이 얼음 위에서 나막신을 신고 작업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비나 눈이 오는 날에 신는 방수용 나막신이 겨울철 채빙 작업에도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Ⅲ. 복식 기록의 특징 및 해석 방식
1. 복식 기록에 나타나는 특징
본 연구에서 다룬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의 복식 기록은 기존 서양인의 기록과 차별화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기록의 일관성과 관찰 조건의 단일성이 특징이다. 기존의 복식사 연구는 다수의 서양인 기록을 병렬적으로 활용해 시대적 양상을 폭넓게 조망했지만, 이는 각 기록자의 시선과 관찰 조건의 차이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려웠다. 반면 본고는 1920~1930년대 서울이라는 제한적 시공간에서, 캐슬린 고먼이라는 동일 인물에 의해 촬영되고 작성된 자료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관찰자의 사회적 배경과 생활 범위, 관찰 조건이 일관되게 유지돼 자료 간 맥락적 일관성을 갖춘다.
둘째, 외부 시선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선택적 수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캐슬린은 약 20년간 한국에 거주하며 장기 체류 경험을 기반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인식한 것은 전통 복식이었다. 당시 서울은 서양 복식이 확산되던 시기였으나, 기증자료에서는 서양 복식보다 전통 복식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했다. 이는 캐슬린이 한복을 한국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시각적 대상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 경향은 갓과 담뱃대, 호박 구슬 끈 등 장신구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장신구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와 상징 질서를 반영한다고 보고, 이를 외부 독자에게 전달하려 했다.
셋째, 복식 기록에서 장신구를 통한 사회구조 파악이 두드러진다. 캐슬린은 한국의 장신구가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사회적 지위와 위계질서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인식했다. 그녀는 담뱃대를 길이에 따라 사용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회적 지표로 묘사했으며, 패영(貝纓)은 귀중품이자 사회적 상징으로 여겨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았던 기념품으로 언급했다. 이 같은 시각은 장신구가 사회적 맥락에서 가지는 기능을 중시하는 관찰 태도를 보여준다.
넷째, 특정 계층과 상황에 편중하지 않고 일상적이고 다층적인 복식문화를 담아냈다는 점이다.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리의 행인, 시장의 상인, 가정의 고용인 등 주로 도시 서민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는 캐슬린과 고먼 가족의 생활 범위와 관계망이 특정 계층에 제한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증자료는 기존 복식 연구가 왕실이나 상류층 위주였던 것과 달리, 일반 민중의 일상적 복식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는 당대 도시 서민층의 생활상을 풍부하게 보여주어 복식 연구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복식 기록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특징을 들 수 있다. 기증자료의 대부분은 공개를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추억과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용도로 작성되었다. 가족 앨범에 부착한 사진에는 간략한 설명을 첨부하여, 당시 상황을 개인적 관점에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적인 기록 방식은 관찰자가 편견 없이 실제 생활 모습을 담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자료가 지닌 객관성과 사실성을 일정 부분 보장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 나타난 복식 기록은 일관적인 관찰자의 조건과 배경, 전통복 중심의 선택적 수집 경향, 장신구를 통한 사회구조 인식, 특정 계층에 편중되지 않은 서민층의 일상 복식 기록,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록 성격 등의 특징을 통해, 기존 연구와는 다른 복식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2.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 범위의 한계
1920~1930년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서양복 확산이 가시화되었다. 신문과 잡지에는 양장점, 구두점 광고가 실렸고, 서울외국인학교(SFS)의 학보 『Red and Black』에서도 양복 광고가 빈번히 등장했다. 1880년대에 처음 도입된 양복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관료, 외교관, 군인의 공식 복식으로 제도화되었고, 191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복에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며 양복은 도시 청년, 상인, 지식인의 외출복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도심에서는 ‘모던보이’, ‘모던걸’로 불린 신세대가 양복과 양장 유행을 주도하며 복식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흐름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 이전까지 이어진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of Basic Necessities: Clothing, 2017).
그러나 기증자료에 등장하는 한국인 대부분은 한복을 기본 복식으로 착용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일상에서 전통 복식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점과 함께 관찰자의 활동 범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주요 관찰자인 캐슬린과 남편 아서 고먼은 음악가와 민간 기업인으로, 다양한 한국인과 폭넓은 교류가 가능했던 외교관, 선교사, 의사 등과는 활동 반경에 차이가 있었다. 아서 고먼은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 한국·만주 지사의 고위 간부로 근무하며 주로 서양인 동료, 일본인 관료들과의 접점을 가졌다. 실제로 아서 고먼의 장례 관련 문서에는 그가 생전에 왕래했던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재한 혹은 재일 서양인이었으며 일부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인과의 공식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문헌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다만 사진자료에서 서울에서 만주로 가는 여정 중 안내자 혹은 동행으로 한국인과 함께한 사례가 일부 나타난다<Fig. 18>.
캐슬린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사로 한국과 일본 상류층 자제들과 교류가 있었다. 특히 이화여전 피아노과 학생들과는 캐나다로 귀국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특정 계층에 한정한 경험이며, 당시 일반적인 한국인들과의 깊은 교류 수준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조선총독부 소속 일본인 고위 인사가 재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주최한 행사나 모임은 기증자료에서 확인되지만, 한국인과 유사한 형태의 만남을 가졌다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Colour and Contrast in Korea와 Kamapsamneda에 나타나는 한국인 일꾼들과의 일화, 유모의 사진<Fig. 19> 등을 통해 고용인들과의 밀접한 관계 정도를 유추할 수 있다.
자료 수집자의 생활 반경은 거주지, 직장, 학교, 영국 공사관 등으로 한정되었다. 고먼 가족이 거주하던 경성부 죽첨정 2정목은 당시 재한 서양인들이 주거지를 형성한 구역이었다. 이 시기 서울 일부 지역에는 외국인 거주지, 학교, 상가 등이 밀집하여 일정 수준 자족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SFS 학보의 광고면 <Fig. 20>에는 양복점, 구두점 등 서양식 상업시설 관련 정보가 게재되어 있어, 1930년대 서울 시내 외국인 인프라의 구축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정동, 남대문, 서대문, 서소문 일대에 분포했다. 이는 민간 외국인이 한국인과의 폭넓은 교류 없이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환경적 배경이다. 고먼 가족이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서대문구와 남대문 일대(세브란스 병원 사택)를 오가며 거주를 이어 나간 것도 이러한 생활의 편의성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캐슬린은 이화여전과 SFS에서 근무했고, 당시 두 학교 모두 정동에 위치했다. 고먼 가족의 자녀를 포함한 서울의 서양인 2, 3세들은 대부분 SFS에 진학했다. 또한, 정동 일대에는 영국 총영사관을 비롯한 외국 공관들이 밀집해 공사관 거리를 형성했고<Fig. 21>, 재한 외국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 되었다.
서울의 서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활한 고먼 가족에게 한국인과의 접촉은 고용인, 상인, 행인 등 제한적이고 일상적인 관계, 그리고 일부 교육적 교류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자료에도 보모, 행상, 일꾼, 빈민 등의 인물이 다수 등장하며, 이들은 대부분 한복 차림이었다.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 한복을 착용한 인물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촬영자인 고먼 가족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 범위에 기인한다. 이들의 활동 반경과 한국인과의 교류 형태는 도시 서민층의 일상복을 중심적으로 기록하게 했다. 또한, 이들이 한국에 체류했던 1920~1930년대는 서양인의 거주가 더 이상 이례적이지 않던 시기로, 개항 초 외국인들이 고종을 알현하거나 개화파 인사, 관료들과 교류했던 19세기 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외국인과 일본인 관료 간의 공식적 교류는 일정 부분 제도화되어 있었지만, 한국인과의 사적 또는 공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기증자료에 한복 중심의 복식 기록 경향을 형성한 주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3. 전통 복식 중심의 수집과 기록 경향
개항 초기 내한 서양인은 대개 정치적·종교적 이유나 여행 등 개인적 호기심을 목적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업적·경제적 목적을 지닌 외국인의 유입이 증가했고,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나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해 도시 구성원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고먼 가족 역시 서울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한국을 고향으로 여겼고, 귀국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실제로 기증자 아일린 커리어는 2023년 인터뷰에서 당시 재한 외국인 2세들이 자신들을 한국인과 동일시했다고 회상했다. 캐슬린 또한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가정 형성과 직업 활동 등을 서울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 생활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기증자료는 기존 연구에서 주로 논의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찰자나 선교·교육 목적의 외부자 시선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내부자적 정체성을 일정 부분 공유했던 이주민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시선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캐슬린 고먼의 글과 사진은 단순한 여행기나 기행문과 달리, 장기 체류 경험과 한국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축적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인상 기록과 구분된다. 고먼 가족은 약 20년간 한국에 거주하며 다양한 생활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글과 사진의 형태로 남겼다. 특히 캐슬린의 원고 Colour and Contrast in Korea는 장기간 한국 생활에서 체득한 내용을 종합한 결과물로, 한국에 대한 기억과 애정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원고는 한국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한국을 서구 독자에게 다면적 시각으로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내용은 한국의 지형과 기후, 도시 풍경, 세시풍속, 복식과 의례, 유교문화와 여성의 지위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무엇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 정적이면서도 활기찬 한국의 복합적 양면을 전달하고자 했다.
앞서, 기증자료에서 한복 차림의 인물이 주로 등장하는 원인을 관찰자의 생활 반경에서 살펴보았다. 이에 이어서 두 번째 이유는 수집자의 시각과 선택 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상당수의 사진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려는 목적보다는 한국 체류 중 촬영하거나 수집하여 개인적으로 보관한 기록물이었다. 실제로 사진 대부분이 가족 앨범에 부착되어 있었고, 사진 하단이나 뒷면에는 촬영 당시 상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사진들은 외부를 의식한 전시용 자료라기보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기억하기 위한 사적인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촬영된 장면 역시 공식 행사나 특정한 목적의 공간보다는, 고먼 가족이 생활했던 정동과 서대문 일대, 한양도성 주변과 같은 일상적 생활 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진은 문헌이나 삽화에 비해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 자료로 간주하지만, 피사체의 선택과 구도에는 촬영자의 주관이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복식 기록에서도 촬영자의 시각과 선택의 개입이 드러났다. 당시 서양복은 외국인에게 익숙한 일상이었지만, 전통 복식은 시각적 이질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지닌 대상이다. 고먼 가족은 한복을 ‘한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의복문화에 관한 관찰과 기록 또한 전통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집 경향은 사진자료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일제강점기 서양인의 한국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당 부분 축적된 상태였다. 개항 이후 방한 외국인이 기행문을 활발하게 출판했고, 『한국지부 회보』 등을 통해 한국 풍속 관련 선행 연구들을 다수 소개했다.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전통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한 상업적 그림과 사진의 유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개항장을 중심으로 판매한 기산풍속도와 20세기 서양인 화가들의 목판 인쇄물이 대표적 사례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릴리안 밀러(Lilian Miller), 폴 자쿨레(Paul Jacoulet) 등은 한국 풍속과 한국인의 모습을 판화로 제작해 외국인들에게 판매 및 유통했다. 이들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당대 생활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풍속(朝鮮風俗)』과 같은 상업적 사진엽서를 활발히 제작했으며, 이 또한 전통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이국적으로 재현한 사례이다. 이밖에 테일러와 모리스는 왕실과 민간의 풍속 사진을 촬영해 주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1920~1930년대에 이르면 이러한 사진과 삽화에서 형성한 시각적 관습이 전통 복식 중심의 선택적 촬영과 수집 경향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20세기 전반은 서양복 차림이 점차 보편화되었던 시기였다. 캐슬린이 근무했던 시기 SFS 학보에서도 서양식 복장을 한 한국인 학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증자료의 복식 관련 사진과 서술에서는 한복이 중심을 이룬다. 이는 기록자가 한복을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이를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수집했음을 의미한다. 즉, 외국인의 시선에서 한복은 일상복의 범주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캐슬린 고먼의 글과 사진은 1920~1930년대 복식문화를 전하는 시각·서술 자료이다. 동시에, 선택과 해석을 통해 구성된 한국 이미지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고먼 가족은 장기 거주와 생활 기반을 통해 일정 부분 내부자적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외부자의 관찰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자료는 내·외부인적 정체성을 동시에 갖춘 외국인의 시선 속에서 당대 복식의 어떤 요소가 ‘한국다움’으로 부각되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Ⅳ. 결론
본 연구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아일린 커리어 기증 아카이브 자료를 중심으로, 1920~1930년대 한국의 복식문화가 서양인의 시선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고찰했다. 이 자료는 캐슬린 고먼이 장기간 한국에 거주하며 촬영하거나 수집한 사진과, 한국 생활을 회고하며 집필한 원고 등으로 구성된다. 동일 인물이 동일 시공간을 배경으로 남긴 시각자료와 문헌자료가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관찰 조건의 연속성과 해석의 일관성이 드러난다. 특히 일상생활 관련 장면을 포착한 사진과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기존 외국인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우선, 기증자료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와 양상에서는 의복, 모자와 장신구, 신발 등을 살펴보았다. 의복에서는 남성복과 여성복, 아동복, 의례복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남성의 외출복은 주로 백색 계열의 두루마기로 소매 폭이 좁았다. 여성복은 가정주부와 여학생 간에 차이가 있었다. 가정주부는 전통적 형태의 한복을 착용한 반면, 근대 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은 통치마와 긴 저고리, 서양식 구두 등 전통과 서양 복식이 혼합된 양상을 보였다. 아동복은 세시풍속과 관련해 명절에 착용한 색동옷 등이 나타나며, 다채로운 색채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문헌자료는 아동 복식의 색상과 구조, 명절 복식과 설빔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 사진이 포착하지 못한 사회적 맥락과 시각적 인상을 효과적으로 보완한다.
백의는 근대 한국 복식문화에서 외국인이 가장 주목한 특징 중 하나였다. 캐슬린 역시 고종 부묘일 당시 서울 거리를 묘사하며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고 기록하는 등 흰옷 차림의 한국인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사진자료에서도 거리의 행인 옷차림이나 빨래터 전경 등에서 흰옷이 다수 확인되었다. 이는 백의가 당시 일상에서 보편적 복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반면, 혼례복에서는 보다 다채로운 색채가 나타났다. 혼례 사진은 일제강점기 서민층의 의례 장면으로, 민간의 전통 혼례복인 원삼과 족두리를 착용한 신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모자와 장신구에서는 갓의 변화, 서양식 모자의 혼용, 갓끈과 담뱃대 등이 나타난다. 갓은 고종대 양태가 좁아지고 모체가 낮아지는 등 형태의 변화를 보였으며, 자료에서도 이러한 전환이 시각적으로 확인되었다. 기록에서는 갓과 상투를 “한 세대 전 남자들의 머리모양”으로 표현하여, 1920년대에 이르면 단발을 하고 서양식 모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한복 차림에 중절모, 맥고모자, 조타모자 등 다양한 서양식 모자의 혼용 착용 사례도 자주 등장했다. 기증자료는 전통과 서양식 복식이 공존한 근대적 과도기의 복식문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복식 기록의 맥락 분석에서는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 반경이 반영된 기록의 특성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고먼 가족은 서울의 서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활했고, 한국인과의 접촉은 주로 고용인, 상인, 거리의 행인 등 제한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에 국한되었다. 이에 따라 촬영 대상도 도시 서민층 인물이 중심이며, 이들 대부분은 전통 한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캐슬린을 비롯한 고먼 가족은 단순히 외부자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내부자적 정체성을 공유한 이주민으로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찰자나 선교 및 교육 목적을 가진 외부자 시선의 기록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복식 기록이 전통 한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관찰자의 생활 반경 외에도, 한복이 외국인의 시선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적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갓끈과 담뱃대 등 전통 복식 관련 기념품이 외국인에게 ‘한국적인 것’으로 소비되었다는 사실은, 외국인이 선택적으로 기록한 복식의 상징성과 연결된다. 이는 고먼의 자료에서도 나타나며, 한복에 집중한 사진과 기술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본 연구는 사진과 문헌자료를 병행 분석하여 근대 복식의 구성, 색상, 착용 맥락을 살폈다. 사진 자료만으로는 복식의 구체적 재구성에 한계가 있어, 문헌자료로써 이를 보완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일린 커리어 기증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동일 인물에 의한 시각자료와 문헌자료의 병존으로 관찰의 연속성과 해석의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전통 복식을 ‘한국적인 상징’으로 인식하고 집중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외국인의 선택적 수집 성향이 드러난다. 셋째, 장신구와 복식 구성요소에 대한 구조적 관찰을 통해, 외국인의 복식 이해가 단순 감상을 넘는 층위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자료의 중심 대상이 도시 서민층이라는 점에서 기존 상류층 중심의 연구와 구별된다. 다섯째, 자료 대부분이 비공식적 개인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어, 객관성과 생활사적 가치를 함께 지닌다.
본고는 기존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았던 시각자료와 문헌을 토대로, 1920~193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복식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장기 거주를 바탕으로 형성한 관찰의 축적과 내부자적 시각을 반영한 본 자료는 향후 복식사와 민속학 분야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조망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존 연구가 외부자 중심의 기록을 통해 복식의 일반적 양상을 조명했다면, 본 연구는 특정 시기와 특정 사회적 층위를 대상으로 기록자의 사회적 배경과 시각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보다 세밀한 복식사의 이해를 도모한다. 이를 통해 외국인의 기록이라는 ‘기록된 전통’의 특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다양한 외국인 자료를 통한 복식문화 연구의 확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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