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초기 對日賓禮 복식 연구 : 『국조오례의』 受隣國書幣儀를 중심으로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ceremonial attire worn by Joseon officials as detailed in the Suingukseopyeui section of the Gukjo-Oryeui.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diplomatic rites for receiving Japanese envoys began with the institutionalization of national rituals under King Taejong and were systematiz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the Ilbon Guksa Sukbaeui. The ceremonies became part of the state ritual system as noted in the Annals of King Sejong and were later included in the Gukjo-Oryeui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establishing the basis for early Joseon diplomatic protocol with Japan. The costumes of Joseon participants in the Suingukseopyeui revealed essential features of ceremonial dress from that era. First, the king wore Ikseongwan and Gonryongpo. Second, attendants wore Sangbok composed of Danryeong, Samo, and Pumdae. Although “Sangbok” and “Sibok” were used interchangeably for Danryeong, the “Sangbok” in this context likely referred to the black Danryeong. Third, the king’s procession was led by the Nobubanjang, identified as the Beopga Nobu. The Doga wore black Danryeong, and the guards and Saguem wore Gibok, presumed to denote armor (Gapju). Fourth, the Beopga Nobu performed Gochwi music during the royal procession, while the Heonga performed during rituals. The Akhak-gwebeom record showed that the attire of the Beopga Nobu musicians matched the regulations of the Heonga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in the palace courtyard. This study provides a foundational analysis of early Joseon’s diplomatic ceremonial attire and aims to enhance understanding of Joseon diplomatic rituals for future comparative research.
Keywords:
Binrye, diplomatic rites toward Japan, Gukjo-Oryeui, ritual dress, Suingukseopyeui키워드:
빈례, 대일외교의례, 국조오례의, 의례 복식, 수인국서폐의Ⅰ. 서론
조선의 국가 의례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오례(五禮)로 분류하여 규정하였다. 오례는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를 뜻하며 이 중 빈례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를 말한다. 조선은 주변국 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공존하기 위한 외교 정책으로 중국에는 사대(事大)하고 일본과 유구 등의 나라에는 교린(交隣)하는 정책을 외교의 기본으로 하였다(Lee, 2024).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기존 연구들은 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하는 통신사(通信使)나 문위행(問慰行)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 사신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Kim, 2021). 대일빈례(對日賓禮) 복식 관련 선행연구 또한 통신사 복식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에서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 복식에 관한 연구는 드물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복식사 분야에서 조선 왕실의 여타 의례 복식 연구에 비하여 주목받지 못했던 대일빈례 복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초기에 제정되어 이후 조선 왕실 의례 규범의 기틀이 되었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에서 교린국 대상 빈례 항목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수인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의 절차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참여자의 직책별 복식을 고찰할 것이다.
수인국서폐의는 인국(隣國)에서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달하는 서계(書契)와 폐물(幣物)을 받는 의식이다. 수인국서폐의는 『국조오례의』보다 앞선 시기에 편찬된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수인국서폐의를 비롯한 전체 빈례 항목의 구성과 순서가 동일하고 상세한 의주(儀註) 또한 유사하다. 그러나 『세종실록』 「오례」의 의주는 불완전한 측면이 있으며, 사실상 시행된 적이 없다고 보여진다(Yun, 2013).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세조 대에서 성종 대 초반에 이루어진 의례 정비가 반영된 『국조오례의』 수인국서폐의를 기준으로 복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선행연구를 통해 조선 초기의 대일빈례 정비 과정을 살펴보고, 『국조오례의』의 수인국서폐의를 중심으로 의례 당일 조선 측 참여자의 구성과 직책을 확인하고자 한다. 기록상에 나타난 참여자를 바탕으로 당대의 조선 왕실 의복 제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직책에 따른 복식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국조오례의』에 편제된 의례에 필요한 세부적인 해설과 도설(圖說)을 엮은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및 궁중 음악과 무용에 대한 서적 『악학궤범(樂學軌範)』 등 동시대의 문헌자료를 참고하였다.
본 연구가 조선 초의 왕실 의례 복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며, 향후 조선 초기 빈례 관련 재현행사 및 미디어 문화콘텐츠 개발에도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조선 초기 대일빈례
1. 조선 초기 대일빈례 성립 과정
본 장에서는 조선 초기의 의례 정비 과정에 나타난 일본을 대상으로 하는 빈례의 성립 과정을 Yun(2013)의 연구를 참고하며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 대부터 국가 의례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 대에 오례에 기반한 의주가 마련되었으며, 이는 『세종실록』의 부록으로서 「오례」로 편찬되었다. 이후 성종 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는 『세종실록』 「오례」를 기본으로 하여 정비된 국가 전례서(典禮書)로서 이후에도 조선 국가 의례의 기본으로 여겨졌다.
1414년(태종 14) 일본 사객(使客)을 위로하는 연회(宴會)법이 정해졌는데, 일본 국왕의 사신은 육조판서가, 제도(諸島)의 사객은 예조 당상관이 대접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하였다.1) 1425년(세종 7)에는 예조에서 왜사(倭使)가 세종에게 숙배하는 ‘왜사숙배절차(倭使肅拜節次)’를 마련하였다.2) 세종 대 중반 이후에는 국가 의례에 필요한 음악과 의장, 복식, 절차 등 구체적인 사항을 제도적으로 확립해나갔다. 1448년(세종 30)에 예조에서 ‘일본국사숙배의’를 정하였는데,3) 이는 최초로 일본국왕사가 국서를 전달하는 의례를 구체적인 의주로 정리한 것이다. 이때 일본 국왕이 파견한 사신을 가리키는 호칭이 ‘왜사’에서 ‘일본국사’로 바뀌었다. 이는 일본을 조선보다 다소 낮은 위치로 설정했었던 조선의 인식이 변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위와 같이 세종 대를 거치며 정립된 대일빈례는 이후 『세종실록』 「오례」에 빈례 의주로서 공식적으로 편제되었다. 「오례」에 보이는 대일빈례는 일본 국왕이 보낸 서폐를 조선 국왕이 직접 받아들이는 ‘수인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 일본 사신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인 ‘연인국사의(宴隣國使儀)’, 그리고 예조가 주관하여 사신에게 베푸는 연회인 ‘예조연인국의(禮曺宴隣國儀)’로 구성되었다. 이후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빈례 의식은 『세종실록』 「오례」와 동일하며, 구체적인 의주 또한 거의 유사하나 동선과 직책명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선 초 대일빈례가 정비된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Table 1>).
2.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의 수인국서폐의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 빈례는 명사신 대상과 교린국 사신 대상 항목으로 크게 나뉘어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수인국서폐의를 제외하면 모두 연회와 관련된 항목이다. 수인국서폐의는 조선의 국왕이 사신이 가져온 국서와 폐물을 받는 의식으로, 교린국 대상 빈례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의례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 수인국서폐의 서두에서 인국은 일본(日本), 유구국(琉球國)과 같다고 주를 달아 정의하고 있다.4) 여기서 ‘유구국(琉球國)’은 오늘날 오키나와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왕국이다. 따라서 ‘인국’은 일본과 유구국을 대표로 하여 조선과 교린 관계를 맺은 주변 국가를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표는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에 편제된 빈례 항목을 정리한 것이다(<Table 2>).
3. 『국조오례의』수인국서폐의 절차
수인국서폐의에 사용된 복식을 분석하기에 앞서, 구체적인 의주와 함께 참여한 인물 구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본 연구의 대상인 『국조오례의』 빈례 수인국서폐의의 절차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의주는 의례 이틀 전과 하루 전의 준비 과정부터 실려 있으며, 의례 당일의 절차는 초엄(初嚴)-이엄(二嚴)-삼엄(三嚴)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수인국서폐의가 행해지기 이틀 전, 예조에서 내외(內外)에 널리 알려 직무를 다하도록 한다. 하루 전에는 액정서에서 근정전 북벽에 남쪽을 향하여 어좌를 설치한다. 보안(寶案)은 어좌 앞 동쪽에, 향안(香案) 2개는 근정전 밖 좌우에 설치한다. 장악원이 헌현(軒懸)을 전정의 남쪽에 북쪽을 향하도록 진열하고, 협률랑이 거휘위(擧麾位)를 서계 위 서쪽에 동쪽을 향하도록 설치한다.
초엄-이엄-삼엄의 절차로 나누어 살펴보며, 각 절차에 참여하는 인원의 명칭은 굵은 글씨로, 복식 관련 사항은 밑줄로 표기하였다.
(1) 鼓初嚴
- 병조에서 제위로 하여금 노부반장을 정계와 전정의 동쪽·서쪽과 근정문 안팎에 진열한다. 군사의 정렬은 모두 식대로 한다. [서례에 보인다.]
- 사복시정이 여와 연, 어마와 장마를 진열한다.
- 시신은 상복을 입고 모두 조당에 모이고, 사자 이하는 차로 나아간다. 예조정랑이 서폐를 받아 들어와서 전계 위에 진열한다.
(2) 鼓二嚴
- 시신은 문외위로 나아간다. 모든 호위하는 관원 및 사금은 각각 기복을 갖춘다.
- 상서원관은 보를 받들고 모두 사정전의 합문 밖에 나아가서 사후한다.
- 좌통례가 합문 밖에 이르러서 부복하였다가 무릎 꿇고서, 중엄을 계청한다.
- 전하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사정전에 나온다. 산선과 시위는 정해진 대로 한다.
- 근시와 집사관이 먼저 사배례를 정해진 대로 행한다.
- 전악은 공인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자리에 나아간다.
- 협률랑이 들어와서 거휘위로 나아간다.
(3) 鼓三嚴
- 집사관이 자리로 나아간다. 인의가 시신을 인도하여 동·서편 문을 거쳐 들어가 자리로 나아간다. 인의가 사자 이하를 인도하여 문외위로 나아간다. [사자가 행하고 그칠 때마다 모두 통사가 지도한다.]
- 소리가 그치면, 안팎의 문을 연다. 좌통례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외판을 아뢴다.
- 전하가 여를 타고 나온다. 산선과 시위는 정해진 의절대로 한다. 전하가 나올 때, 의장이 움직이고, 고취가 연주한다.
- 전문을 들어올 때, 협률랑이 꿇어앉아 부복하고 휘를 들고 일어난다. 공인이 축을 치고,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며, 고취는 그친다.
- 전하가 어좌에 오르면 향로에 연기가 오른다. 상서관원이 보를 받들어 안에 놓는다. 산선과 시위는 정해진 의절대로 한다.
- 협률랑이 꿇어앉아 휘를 가로눕히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난다. 공인이 어를 치고 음악이 그친다.
- 여러 호위하는 관원이 들어와서 어좌 뒤와 전내의 동쪽·서쪽에 늘어서고, 승지가 전내의 동쪽·서쪽에 나누어 들어와서 부복하고, 사관은 그 뒤에 있다. 사금이 전계위에 나누어 선다.
- 전의가 사배를 지시하고, 찬의가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한다. [찬의의 찬창은 모두 전의의 말을 받아서 한다.] 시신이 국궁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사배흥평신하고, 음악이 그친다.
- 서로 마주하여 선다. 인의는 사자 이하를 인도하여, 서편문을 거쳐 들어가 자리로 나아간다.
- 찬의가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여, 사자 이하가 국궁하면 [통사가 전하여 창한다.] 음악을 연주하며, 사배흥평신하고, 음악이 그친다.
- 전교관이 나와서 서계를 취하여 들어가 아뢰고 교지를 받들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동문을 거쳐 나와 계단에 서향하여 서서 교지를 선포하며 객사를 맞이하여 전에 오르라고 한다.
- 통사가 무릎 꿇었다가 부복하여 전교를 받들고 일어나서, 사자를 인도하여 서편계를 거쳐 올라가 들어가서, 앞 기둥 사이에 이르러서 무릎 꿇었다가 부복한다. 뜰에 있는 반종은 모두 무릎 꿇는다. 전하가 국왕의 안부를 묻고, 사자를 위로한다.
- 마치면, 사자와 부사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문을 나간다. 반종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평신한다. 통사가 사자와 부사를 인도하여 나가고, 반종이 따라나간다.
- 시신이 모두 절하는 자리로 돌아간다. 찬의가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한다. 시신이 국궁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사배흥평신하고, 음악을 그친다.
- 좌통례가 서편계로 올라가 나아가서 어좌 앞에 당도하여 부복하였다가 무릎 꿇고서, 예가 끝났음을 아뢰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내려가서 자리로 돌아간다.
- 협률랑이 꿇어앉아 부복하였다가 휘를 들고 일어난다. 공인이 축을 치고, 음악을 연주한다.
- 전하가 어좌에서 내려와 여를 탄다. 산선과 시위는 올 때의 의절대로 한다. 전문을 나설 때 고취가 연주한다.
- 협률랑이 꿇어앉아 휘를 가로눕히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난다. 공인이 어를 치고 음악이 그친다. 사정전으로 돌아간다. 고취가 그친다. 인의가 시신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간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國朝五禮儀』 卷5 賓禮 受隣國書幣儀 국역을 참고함)
위와 같이 『국조오례의』 빈례 수인국서폐의 의주를 통해 의례 당일의 절차가 초엄-이엄-삼엄 순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여하는 인원의 구성 및 일부 참여자의 복식, 의례가 진행되는 공간의 변화와 동선을 확인하였다.
Ⅲ. 수인국서폐의 참여자의 구성과 복식
1. 수인국서폐의 참여자
본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국조오례의』 수인국서폐의 의주에서 실질적으로 의례가 이루어지는 당일의 과정에 참가하는 인물을 확인하고, 각 직책에 해당하는 복식 구성을 분석하였다. 군사와 의장,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을 포함한 노부반장의 경우, 수인국서폐의 의주에 직접적으로 기재되지 않은 인원 구성이 다소 많은 관계로 다음 장에서 복식과 함께 별도로 정리하고자 한다.
참여자 중 집사관(執事官)은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의례가 있을 때 임시로 임명(차정, 差定)하여 일을 맡아 주관하게 하는 집사관으로, 의식의 성격에 맞추어 구성된다. 또 다른 경우는 통례원(通禮院) 소속의 관원이 전임의 본직으로서 참여하는 경우이다(Kang, 2004). 수인국서폐의를 담당하는 집사관은 『국조오례서례』 빈례 항목에서 별도로 제시하고 있으며, 전교관(傳敎官)은 승지(承旨)가, 전의(典儀)는 통례원 관원(通禮院官)이, 협률랑은 장악원 관원(掌樂院官)이 맡는다.5) 의주에 등장하는 찬의(贊儀), 인의(引儀),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 또한 통례원 소속으로, 본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집사관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집사관을 포함하여 의주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참여자 관련 내용은 <Table 3>에 정리하였다. 다만 동일한 직책이 다른 명칭으로 여러 번 언급되는 경우, 한 가지 직책명으로 한 번만 기재하였다.
2. 수인국서폐의 참여자 직책별 복식
수인국서폐의에 참여하는 조선 국왕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간다.6)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15세기 후반의 익선관복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기록을 참고하고자 한다.
다음은 『국조오례의』 편찬 4년 뒤인 1478년(성종 9)에 명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사(聖節使)로서 북경에 다녀온 한치형과 성종의 대화 중 일부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정동(鄭同)은 조선 출신 명의 환관으로, 한치형과 정동의 문답에서 당대 조선 왕의 곤룡포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돌아오는 날에 정동이 통주(通州)에서 신을 배웅하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어떤 옷을 늘 입으십니까?’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강색(絳色)의 곤룡포를 늘 입으십니다.’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전하와 왕비·선왕비(先王妃)가 늘 입는 옷을 보고 싶어하니, 유청(柳靑)·자주·초록 따위 여러 가지 색의 옷을 각각 서너 벌씩 지어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성종실록』, 1478년 12월 21일)
위 기사에 따르면 왕이 평상시에 입는 곤룡포의 색상이 강색(絳色)이며, 명의 황제가 조선의 왕과 왕비가 늘 입는 옷을 궁금해한다는 대목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사여받지 않고 조선에서 직접 지어 사용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수인국서폐의 의주에서 시신은 모두 상복(常服)을 입고7) 모인다고 하였으며, 상복은 곧 단령과 사모(紗帽), 대(帶) 차림이다. 조정 관리의 관복 제도에 대해서는 본 연구의 대상인 『국조오례의』의 편찬과 유사한 시기에 제정된 법전인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살펴본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의장(儀章)에 규정된 품계에 따른 상복의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Table 4>).
『경국대전』에 기록된 품계별 상복 제도를 살펴보면, 관모는 품계와 관계없이 모두 사모를 쓴다. 화(靴)는 목이 긴 신을 말하며, 3품 당상관 이상만 협금화(挾金靴)를 신을 수 있었다. 대(帶)는 품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정해져 있다. 1품 서대(犀帶), 정2품 삽금(鈒金), 종2품 소금(素金), 정3품 삽은(鈒銀), 종3품과 4품은 소은(素銀), 5품부터 9품은 흑각(黑角)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흉배(胸背)는 당상관만 부착하도록 하였으며,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동물 문양의 흉배를 달았다. 1품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문관은 공작(孔雀), 무관은 호표(虎豹) 흉배이며, 2품 문관은 운안(雲雁), 무관은 1품과 동일한 호표, 대사헌(大司憲)은 해치(獬豸)이다. 3품 문관은 백한(白鷴), 무관은 웅비(熊羆) 흉배이다.
단령인 복(服)은 소재만 기록하고 있는데, 1품부터 3품까지만 고급 직물이었던 사(紗)·라(羅)·능(綾)·단(段)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색상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아 다른 문헌 자료를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조선 건국 후 본 연구의 시대적 배경인 15세기까지 ‘상복’과 ‘시복(時服)’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관리의 단령을 가리키는 말로서 혼용되었으며, 구체적인 색상 규정이 없는 잡색 단령을 사용하였다. 15세기 중반부터 용도에 따른 단령의 색상 규정이 정해지기 시작했는데, 1446년(세종 28) 조계(朝啓)·조참(朝參)에 상복을 그대로 입어 공경하는 뜻이 없으니, 검게 염색한 조의(朝衣)를 마련하여 평상시를 제외한 조회(朝會) 때에 입도록 하였다.8) Lee(2005)는 이것이 곧 의례용 흑단령의 유래이며, 용도에 따라 단령의 색상이 구분되기 시작한 시기로 보았다. 이후 1454년(단종 2)에도 조계·상참(常參)·조참·회례연(會禮宴)·사신을 영접할 때, 향(香)을 받을 때 이외에만 대소 신료(大小臣僚)에게 토홍색(土紅色) 옷을 입게 하였다는 기록9)을 보아 예복으로서의 흑단령이 유지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경국대전』 「예전」에서도 품계별 복제를 제시하기에 앞서, “조참·상참(常參)·조계에서 모두 흑의(黑衣)를 입는다”10)고 하여 세종 대의 흑의 제도가 이어지며 의례에서는 흑색 단령을 입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용도와 색상에 따른 단령의 명칭이 정확히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의’로만 기록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610년(광해군 2)에 있었던 시복과 상복에 관한 다음의 논의를 통해서도 『국조오례의』에 제정된 의례에서 말하는 ‘상복’이 흑단령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오례의』의 흑단령은 상복이라고도 하고 시복이라고도 하는데, 비록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알성할 때 유생들의 상복과 중국 사신이 올 때의 백관의 상복은 분명 흑단령입니다.”(『광해군일기』, 1610년 5월 19일)
또한 동년 9월에는 성균관 문묘에 참배하는 의례인 알성(謁聖)에서 독권관(讀券官) 이하가 시복을 입는 것이 맞는지 예관(禮官)에게 물었는데, 이에 대해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사신 영접 등의 의례에서 입는 것은 상복이며, 의례용 상복은 곧 흑단령임을 재차 상고하고 있다.
“세간에서 홍단령(紅團領) 차림을 상복이라 하고 흑단령 차림을 시복이라고 합니다만, 『오례의』에 기재된 것을 보면 흑단령 차림을 상복으로 삼은 곳이 매우 많은데, 가령 칙사를 영접할 때의 의례라든가 조참·상참 등의 의례, 배표(拜表)할 때 입는 사자(使者)의 복색 모두를 상복으로 기재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이번에 알성하고 인재를 뽑을 때 독권관 이하의 복색을 상복으로 한다면 실제로는 흑단령 차림으로 입시하는 것입니다.”(『광해군일기』, 1610년 9월 8일)
따라서 수인국서폐의는 타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상복 단령 중에서도 집무용 잡색 단령이 아닌 의례용 흑단령을 입으며, 1품부터 3품 관리는 흉배를 달아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 빈례 수인국서폐의에서는 병조에서 제위로 하여금 노부반장을 정계 및 전각 뜰의 동서쪽과 근정문 안팎에 진설하게 하며, 군사의 정렬은 모두 『국조오례서례』를 참고하도록 하였다.11) 노부행렬은 왕이 이동할 때 함께 움직인다. 크게 전(前)・중(中)・후(後)부로 나눌 수 있으며, 전부는 길을 인도하는 도가(導駕)와 전위대(前衛隊), 중부는 의장(儀仗)과 어연(御輦) 및 시위(侍衛), 후부는 백관(百官)과 후위대(後衛隊)로 구성된다(Jo, 2017).
조회나 제향(祭享), 또는 능행(陵行)이나 원행(園幸) 등의 여러 왕실 의례 또는 행차 시 격식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상징물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기물을 의장물이라고 하였다. 이동을 전제로 한 경우와 전정에 배치하는 경우로 나누어 ‘노부’와 ‘의장’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의미로 혼용되기도 하였다(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2018). 노부는 행차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나누는데, 이러한 구분에 대응하여 의장은 대장(大仗)·반장(半仗)·소장(小仗)으로 구분되며 각 노부와 동일한 의물을 사용한다(Kang, 2012). 『국조오례서례』 「가례(嘉禮)」의 노부 중 법가의 의물은 전정의 반의장(半儀仗)과 같은 것12)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따라서 수인국서폐의에 진설하는 노부반장이 곧 법가노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조오례서례』의 법가노부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면, 수인국서폐의 의주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의례 참가자 구성, 복식과 기물을 보다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국조오례서례』에 나타난 법가노부의 구성을 선두부터 언급된 순서에 따라 <Table 5>에 정리하였으며,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항목은 비워두었다.
(1) 도가(導駕)
도가는 노부의 가장 선두에 위치하여 길을 인도하며 정리하는 역할이다. 법가노부의 도가는 당부주부-한성부판윤-대사헌-의금부당하관의 순서이며, 모두 상복을 입는다. 상복의 제도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예복용 흑단령 차림일 것으로 생각된다.
(2) 군사(軍士)
도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군사는 좌상군사(左廂軍士), 군사, 사대(射隊)로 이루어져 있다. 수인국서폐의 의주에서 모든 호위하는 관원 및 사금은 기복을 갖춘다[各具器服]고 한다. 여기서 ‘기복’이라 함은 기물과 의복이며, 각자의 역할에 맞는 복색을 갖추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호위관원과 사금의 ‘기복’이 군사 복식인 갑주와 융복 중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국조오례서례』 법가노부에 따르면 군사 대부분이 갑주와 병기를 갖춘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의주 내에서 의장의 취각(吹角)·시위의 사금(司禁)·후부의 병조와 도총부관원의 복식은 기복으로 정하여 갑주·병기 차림과 다른 복식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의 기사를 통해 기복은 융복이 아닌 갑주를 의미함을 추측할 수 있다.
"모든 장수는 기복을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다만 화려한 빛깔을 쓰지 말고, 흑칠(黑漆)한 갑주를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중략)···"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이 기복을 갖추어야 마땅하다면 시복에 궁검(弓劎)을 찰 수 없고, 지금 국상 중에 있으므로 또한 빛깔이 있는 갑주를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잡색의 갑주를 쓰고 시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에는 빛깔이 있는 갑주를 쓰고, 시어(侍御)할 때에는 흑칠한 갑주를 쓰도록 하라." 하였다.(『성종실록』, 1483년 6월 16일)
위 기사는 1483년(성종 14) 국상(國喪) 중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장수의 기복 차림에 대한 논의 중 일부이다. 시위하는 장수의 기복이란 본래 빛깔 있는 갑주라는 점을 전제로 한 논의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어서 살펴볼 1530년(중종 25)의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복 또한 갑옷과 투구, 즉 갑주로 이해되며, 융복과 별개의 복식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이어 16세기 초반 중종 대의 두 기사 또한 기복은 곧 갑주를 의미함을 나타낸다.
“이번 배릉 때에 백관이 융복(戎服)으로 시위하는 것을 예조에 물었더니 ‘정희 왕후 때에는 의궤가 그러하였으나 그때에는 연제(練祭) 뒤에 배릉하였기 때문이며, 오례의의 의주를 보니 제장(諸將)은 융복으로 시위하고 백관은 백의(白衣)를 입고 수가(隨駕)한다 하였다.’ 합니다. 모든 일은 한결같이 예문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바는 마땅하다. 다만 제장은 기복(器服)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중종실록』, 1530년 11월 9일)
이달 13일 배릉 때에 다른 장사(將士)는 기복으로 시위해야 하겠으나, 운검 선전관(雲劍宣傳官)과 내승(內乘) 등은 아주 가까이 시위하는 사람이니, 흰 융복으로 수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기복을 갖추는 것은 예문에 실려있으나 위에서 이미 흰옷을 입으시고 모든 의장(儀仗)을 다 흰색으로 한다면, 병조와 도총부(都摠府)의 당상(堂上) 및 별운검(別雲劍) 등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색채가 있게 함은 매우 미안합니다.(『중종실록』, 1530년 11월 11일)
이처럼 여러 기사를 통하여 당대 시위하는 인원의 ‘기복’이라 함은 갑주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기복은 곧 융복으로 이해하는 용례가 보이는데, 적어도 본 연구의 시대적 배경인 15세기 말-16세기 초에는 호위하는 관원과 사금의 ‘기복’은 갑주와 무기 차림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Table 6>은 『국조오례서례』 군례(軍禮) 병기도설(兵器圖說) 중 갑주에 해당하는 도설을 정리한 것이다.
수은갑(水銀甲)은 쇠로 찰(札)을 만들고 수은을 바른 후 가죽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쇄자갑(鏁子甲)은 철사(鐵絲)로 작은 고리를 만들어 서로 꿰어 만든 것이다. 철찰(鐵札)과 철환(鐵環)을 서로 엮은 것은 경번갑(鏡幡甲)이라 한다. 도설이 없는 유엽갑(柳葉甲), 피갑(皮甲), 지갑(紙甲)도 제도가 같다. 두정갑(頭釘甲)은 두 가지 색이다. 하나는 청면포(靑綿布)로 만드는데, 철찰을 엮어 소조(塑造)하고 철두정(鐵頭釘)을 늘어뜨려 배열한다. 다른 하나는 홍단자(紅段子)로 만들고, 속은 연녹피(烟鹿皮)를 사용하며 별도로 소매를 만들고 끈이 있으며 황동 두정을 박는다. 넓은 홍색 조대(絛帶)가 있다. 두두미갑(頭頭味甲) 또한 두 가지 색이다. 하나는 청단자(靑段子)로 만들고 속은 연녹피를 사용하며 백은색과 황동색의 두정(頭釘)을 박고 오색으로 짠 띠가 있다. 다른 하나는 홍단자를 사용하고 넓은 홍색 조(絛)를 사용한다. 투구는 철로 만들며 챙이 있는 것은 첨주(簷冑), 챙이 없는 것은 원주(圓冑)라 한다. 기복 또는 갑주를 입는 인원은 위와 같이 『국조오례서례』에서 제시한 갑주 중 각 신분과 직책에 맞는 것을 착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의장(儀仗)
의장기(儀仗旗)인 홍문대기를 드는 20인은 청의(靑衣)와 피모자(皮帽子), 홍개를 드는 1인은 청의와 자건(紫巾), 오방기 5인과 금·고·백택기·시명지보·유서지보·소신지보를 드는 16인은 홍의(紅衣)와 피모자 차림이다. 인로 10인은 청의와 자건이며 상서원 관원은 조복을 입는다. 이어 삼각기·각단기·용마기·천하태평기·현학기·백학기 9인은 홍의와 피모자이다.
이어 취각이 뒤따르는데, 취각과 후부고취는 왕실의 여러 의장 중 왕의 노부에만 포함된다(Lee & Kim, 2024). 취각(대각 2, 중각 2, 소각 2)은 기복(器服)이며 이는 곧 군사 복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갑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장마(仗馬)를 끄는 4인은 청의와 종색립(椶色笠), 운혜(雲혜) 차림이며 후에 반복하여 나오는 장마를 끄는 인원도 모두 같다. 표골타자·과·부·한·필·등·도·정·모·당·봉·작자·용선·봉선·작선을 드는 18인에 이어 장마 4인이 있고, 웅골타자·영자기·가귀선인기·고자기·금자기를 드는 9인과 다시 장마 4인이 배치되며, 이어 가서봉 6인과 벽봉기 1인이 있고, 이어 장마 4인과 금등 6인, 군왕천세기 1인이며 장마 4인이 이어지고, 금장도와 은장도 2인이 있다. 장마를 끄는 인원의 복식은 앞과 같으며, 이외에는 모두 홍의와 피모자 차림이다.
은교의 2인은 자의(紫衣)와 자건을 입으며, 주작당·청룡당·백호당·현무당 4인은 홍의와 피모자, 은관자와 은우 2인은 자의와 자건을 입는다. 이어 은립과·금립과·금·고 6인과 장마 4인, 은횡과·금횡과·은작자·금작자 10인이며 장마를 끄는 인원은 앞과 같고 나머지는 홍의와 피모자 차림이다. 이어 청양산 2인은 청의와 자건이다.
소여를 드는 여사 30명은 흑건을 쓰고, 자의와 학창(鶴氅), 청행등(靑行滕) 차림에 홍대(紅帶)를 하며 운혜를 신는다. 다음으로 한·필·모절·정·은월부·금월부를 드는 10인은 홍의에 피모자 차림이며, 다시 장마 4인이 있다. 다음으로 상복 차림에 검을 찬 사복시관원이 뒤따르며, 봉선 6인은 홍의와 피모자, 청개 2인은 청의와 자건, 작선 6인은 홍의와 피모자, 홍개 1인은 청의와 자건, 용선 2인은 홍의와 피모자 차림이다.
(4) 여연(御輦) 및 시위(侍衛)
사금 16인은 앞서 군사복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복을 입고 주장(朱杖)을 든다. 이어 상복 차림의 여러 시신이 따르며, 그 뒤로 갑주와 병기 차림의 기보대(좌우기대 2열, 보대 3열)가 이어진다.
다음은 전부고취(前部鼓吹)이다. 『국조오례서례』, 『악학궤범』에 따르면13) 전부고취와 뒤에서 등장 할 후부고취(後部鼓吹)는 각각 집박악사(執拍樂師) 1인, 악공 50인으로 구성된다. 관복은 성종조의 전정헌가와 같다고 하였는데, 성종조 전정헌가에 사용하는 악사와 악공의 복식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상복에 운검을 찬 대호군 2인이 있고, 수정장과 금월부를 든 2인은 청의에 자건이며, 별감 40인은 흑의(黑衣)에 자건이다. 홍양산 1인은 청의에 자건, 충의위 30인은 공복을 입는다. 은마궤를 든 1인은 청의에 흑립(黑笠)을 쓴다.
왕의 가마인 여연을 드는 봉담 60인은 자의와 흑건, 학창, 청행등 차림에 홍대를 하고 운혜를 신는다. 청선을 든 2인은 청의에 자건, 중추원 소속 4인은 갑주 차림에 운검을 찬다. 갑(甲)을 든 상호군 1인과 주(冑)를 든 상호군 1인, 궁시(弓矢)를 든 상호군 12인은 모두 갑주 차림에 검을 찬다.
현무기 1인은 홍의와 피모자, 후전대기 2인은 청의와 피모자이다. 이어 어의를 든 호군 6인, 내시부 관원, 상의원 관원, 내의원 관원은 모두 상복을 입는다. 후부고취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다음 장의 공인 복식에서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표기 1인이 따르며 복식에 관한 언급은 없다.
(5) 백관(百官) 및 군사
노부 행렬의 마지막은 백관과 군사들이다. 무관인 병조와 도총부의 관원은 모두 기복을 입는다. 승지, 주서, 사관, 예조 당하관, 병조 당하관 1인, 종친을 비롯한 나머지 문무백관은 상복 차림으로, 수인국서폐의 의주에서 제시한 바와 일치한다. 이어 군사 행렬인 사대와 잡류기 1인 우상군사는 모두 갑주 차림에 병기를 든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수인국서폐의에서 전정에 진설되는 의장은 법가노부이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법가노부의 예행(禮行)에는 전정헌가(殿庭軒架)를 진설한다.14) 왕이 이동할 때에는 노부의 고취가 연주하며, 의례 진행에 필요한 음악은 헌가가 연주한다.
전정에 설치하는 헌가는 『악학궤범』 속악진설도설 중 시용전정헌가(時用殿庭軒架)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able 7>은 시용전정헌가에 나타난 악사 및 악공의 복식이다. 『악학궤범』에는 『국조오례의』와 성종조(成宗朝)의 전정헌가가 함께 실려있으나, 성종조의 전정헌가에만 복식을 포함한 상세한 해설이 달려있으므로 성종조 전정헌가를 기준으로 검토하였다. 또한, 앞서 노부의장의 복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가노부 중 전부고취, 후부고취를 연주하는 공인의 복식 제도도 전정헌가와 같다.

Gongin costumes in Siyong-jeonjeong-heonga of King Seongjong’s reign, as depicted in Sokak-jinseol-doseol of Akhakgwebeom
협률랑 1인과 집박악사 1인으로 구성된 악사 2인은 복두(幞頭)를 쓰며 녹초삼(綠綃衫)에 오정대(烏鞓帶)를 하고, 흑피화(黑皮靴)를 신는다. 악공 59인은 모두 꽃을 그려 넣은 화화복두(畵花幞頭)를 쓰며, 소화흉배(小花胸背)를 단 홍주삼(紅紬衫)에 오정대를 한다.
『악학궤범』의 관복도설(冠服圖說)에서는 악사 및 악공 복식을 도설과 함께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어, 이를 통해 앞서 살펴본 성종조 시용전정헌가에 사용된 복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복두(幞頭)는 종이를 배접해서 만들며 안에는 고운 베를 붙이고, 검게 칠하며 각(角)이 있다. 악사와 악공 모두 복두를 쓰지만, 악공의 복두는 앞뒤와 양각에 꽃을 그린다고 하여 이것이 곧 시용전정헌가 의주에서 확인한 화화복두(畵花幞頭)임을 알 수 있다.
악사가 입는 녹초삼(綠綃衫)은 소매가 넓은 단령의 형태로, 녹초(綠綃)로 만든다. 도설에는 치수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화장의 길이가 직물의 한 폭 반이며, 품이 1척 5촌, 길이가 3척 1촌, 소매 너비가 1척 4촌이다.
악공의 옷인 홍주삼(紅紬衫)은 관복도설에 홍주의(紅紬衣)라는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홍색주(紬)로 지으며, 흉배에 모란(牡丹)을 그리며 녹색 흉배라고 하여 소화흉배(小花胸背)가 녹색 바탕에 모란을 그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정대(烏鞓帶)는 악사와 공인이 모두 착용한다. 오정대는 나무로 갈고리를 만들고 검은 칠을 한다. 악사는 검은 가죽으로 만들며 목이 긴 흑피화(黑皮靴)를 신으며, 악공의 신은 별도 기록이 없다.
이와 같이 살펴본 전정헌가에 사용된 악사 및 악공 복식 구성에 해당하는 『악학궤범』에 관련된 도설은 <Table 8>에 정리하였다.
Ⅵ. 결론
본 연구에서는 조선 초 대일빈례 복식을 『국조오례의』의 수인국서폐의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조선 초기 대일빈례는 태종 대 국가 의례 정비 과정을 거쳐 세종 대에 일본국사숙배의가 마련되어 체계를 갖추었으며, 『세종실록』 「오례」에 편제됨으로써 국가 전례로 공식화되었다. 나아가 성종 대 『국조오례의』로 계승되어 조선 전기 대일 외교 의례의 기본 틀로 정착되었다. 빈례 중 교린국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는 세 가지이다. 일본 국왕이 보낸 서폐를 조선 국왕이 받아들이는 수인국 서폐의, 일본 사신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인 연인 국사의, 그리고 예조가 주관하여 사신에게 베푸는 연회인 예조연인국사의이다. 이 중 두 가지는 연회에 해당하며, 가장 중심이 되는 수인국서폐의 과정 중 실질적으로 의례가 이루어지는 당일에 참여하는 인원과 복식을 분석하였다.
『국조오례의』 수인국서폐의 의주에 등장하는 조선 측 인원은 다음과 같다. 의례는 왕이 중심이 되며, 집사관으로는 전교관·전의·협률랑·인의 ·좌통례·우통례가 참여한다. 시신은 사관·사복시정·예조정랑·상서원관원·사금·통사가 있다. 전악과 헌가를 연주하는 공인이 참여하며, 왕의 의장으로는 노부반장이 설치된다.
의례에 참여하는 조선 측 인원의 복식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도출하였다.
첫째, 왕은 상복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는데, 『성종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이 시기 왕의 곤룡포는 강색(絳色)이며, 중국으로부터 사여받지 않고 조선에서 직접 지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시신은 모두 상복을 입으며 이는 곧 단령과 사모, 품대로 구성된다. 본 연구의 시대적 배경인 15세기까지 ‘상복’과 ‘시복’이라는 명칭이 단령을 가리키는 말로 혼용되었으나 수인국서폐의에서 말하는 상복 단령은 집무용 잡색 단령이 아닌 의례용 흑단령이다.
셋째, 수인국서폐의에서 왕의 의장은 노부반장이며 노부반장은 곧 법가노부이다. 법가노부의 가장 선두에 위치하는 도가는 모두 상복, 즉 예복용 흑단령을 입는다. 또한 호위 관원과 사금은 기복을 착용한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의 기사를 통해 본 연구 대상 시기인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시위하는 인원의 ‘기복’은 융복이 아닌 갑주를 지칭함을 확인하였다.
넷째, 수인국서폐의에서 왕의 행차 시에는 법가노부의 고취가 연주하며, 의례 중 연주되는 음악은 헌가가 맡는다. 고취와 헌가에 따르는 공인의 복식은 모두 전정헌가의 제도를 따른다. 이에 『악학궤범』 속악진설도설 중 시용전정헌가의 성종조 전정헌가를 기준으로 악사와 악공의 복식 제도를 우선 파악하였으며, 관복도설을 통해 세부 구성을 살펴보았다. 악사 2인은 복두를 쓰며 녹초삼에 오정대를 하고 흑피화를 신는다. 악공은 모두 꽃을 그려 넣은 화화복두를 쓰며, 소화흉배를 단 홍주삼에 오정대를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수인국서폐의에 나타난 조선 측 복식을 중심으로 15세기 대일빈례 복식의 제도와 구성을 확인하였다. 조선 초기 국가 제도의 기반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빈례·복식·음악·의장 제도가 상호 연동되어 작동하였음을 문헌 간 교차 검증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한 데에 의의가 있다. 각 참여자의 복식 구성을 상세하게 검토하지 못한 점과 조선 측 참여자의 복식만을 다룬 점은 본 연구의 한계로 남는다. 향후 양국의 사행 관련 의례의 추가 연구를 통해 대일빈례의 체계와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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