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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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 No. 1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9, No. 1, pp. 141-162
Abbreviation: JKSC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Jan 2019
Received 15 Dec 2018 Revised 08 Jan 2019 Accepted 08 Jan 2019
DOI: https://doi.org/10.7233/jksc.2019.69.1.141

조선 초기 문묘제례(文廟祭禮)의 일무(佾舞) 복식 연구
박민재 ; 조우현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박사과정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Study of the Ilmu Costume of Munmyojere of Early Josun Dynasty
Park, Min Jae ; Cho, Woo Hyun
Ph.D. Course,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Professor, Dep. of Fashion Design, Sungkyunkwa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Cho, Woo Hyun, e-mail: joy54@hanmail.net


Abstract

Munmyo is a Shrine for Confucius and great Confucianist, and it is a shrine to honor of their achievements and study. Ilmu of Munmyojere is a kind of ritual dance and it contains Confucian decorums and music. Ilmu, ritual dance which had stemed from ‘The six great dance of ancient [육대대무]’ of Zhou Dynasty and it was introduced in Korea with ‘Daesungaak[대성아악]’ of the Song Dynasty on the King Yejong of Goryeo Dynasty in 1116. The core significance and concept of this ritual is audiovisually expressed as through the ‘Ak[악(樂)] the integrated concept of music, singing and dancing. Music and songs which it played during the ritual procedures are auditory expressions and Ilmu is a visual representation. Through these audiovisual expressions, Confucian scholar tried to enlighten people and unify society with Confucian ideas and philosophie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research of the Ilmu costume at the early Joseon Dynasty, it was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Ilmu, which is currently performed. Originally, Ilmu costume of Munmyojere Consists of black colored Jojusam[조주삼], Baekjujungdan[백주중단], Baekjugo[백주고], Geumdonghyeokdae[금동혁대], Baekpomal[벡포말], Opiri[오피리]. The differences of Munmu and Mumu costume are only seen in the official cap and props. I hope that this research will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Munmyojere, and also more related research will continue in the future.


Keywords: costume, Ilmu, Jojusam, Mumu, Munmu, Munmyojere
키워드: 복식, 일무, 조주삼, 무무, 문무, 문묘제례

Ⅰ. 서론

의례(儀禮)로서의 예악(禮樂)은 제의적 의식(儀式)을 기원으로 하고 그 의식의 과정에는 춤과 노래 등이 있다. 여기서의 춤과 노래는 난장판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절도 있는 윤리도덕의 발생사 및 사회통합의 지속과 관련이 있다(Lee, 1998).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주(周)나라 기원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은 공자(孔子)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리고 공자 이후 송대(宋代)의 주자(朱子)가 형성한 예악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예악사상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대표적 의례가 종묘제례(宗廟祭禮)와 문묘제례(文廟祭禮)이다. 종묘제례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것이며, 문묘제례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성인(儒學聖人)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의례이다. 문묘제례는 성균관대학교 교내에 위치해 있는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에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석전대제의 명칭으로 198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었다. 종묘제례가 세계무형유산에 선정된 이후 문묘제례 역시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관련 분야를 비롯한 많은 곳에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른 의례와 마찬가지로 문묘제례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일무(佾舞)일 것이다. 공자와 유학(儒學) 성인(聖人)들의 문덕을 칭송하는 문묘제례에서 일무는 일종의 시각적 표현방식으로서 청각적 표현인 문묘제례악과 함께 연행된다. 일무 복식은 이러한 일무를 연행할 때 무인(舞人)들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문묘제례의 고증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다른 전통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묘제례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현재 연행되고 있는 문묘제례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일무 복식은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성된 형태로 조선 초기의 일무 복식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역사에서 예악(禮樂)이 새롭게 정립된 시기인 조선 초기의 일무 복식을 실증 하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조선의 개국부터 악학궤범이 완성되는 성종(成宗)대까지의 조선 초기 일무 복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해당 시기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의 문헌기록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을 실증하고자 한다.


Ⅱ. 조선 초기의 문묘제례 도입과 일무의 유래
1. 우리나라 문묘제례의 도입

문묘제례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역대 성현(聖賢)들의 학덕을 추앙하고 본받고자 올리는 제사 의례로 석전제(釋奠祭)ㆍ상정제(上丁祭)ㆍ정제(丁祭)ㆍ공자제(孔子祭) 등 여러 가지 명칭을 갖고 있다.

먼저 문묘제례의 경우 문묘(文廟)에서 올리는 제례라는 의미로 문묘제례가 봉행되는 장소에서 그 명칭이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석전의 경우 그 의미가 제례의 형태 또는 형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석(釋)은 차려놓음을 의미하며 전(奠)은 덮개가 덮인 술병을 형상화한 글자로 이는 음식과 술을 차려놓고 행하는 제사의식을 뜻한다. 본래 석전은 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제사인 대사(大祀)가 아닌 중사(中祀)에 속하지만 임금이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도 한다. 상정제(上丁祭)ㆍ정제(丁祭)는 제사를 올리는 날짜에서 기인한 명칭으로 일 년에 두 번 2월과 8월에 12간지의 정(丁)이 들어가는 첫 번째 날을 택하여 제사를 봉행했기 때문이다. 문묘는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된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곳에서 공자를 비롯한 유학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제사를 올리기 때문에 공자제(孔子祭)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문묘제례의 여러 명칭과 그 유래를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Table 1> 
A fountainhead of various title
Title of Munmyojere (文廟祭禮) a fountainhead of title
Munmyojere (文廟祭禮) title from the place of the rite
Seokjeonje (釋奠祭), Seokjeondaeje (釋奠大祭) title from the form of the rite
Sangjeongje (上丁祭), Jeongje (丁祭) title from the date of the rite
Gongjaje (孔子祭) title from the subject of the rite

주대(周代)에는 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을 선성(先聖)으로 올려 제사를 지냈으나 한대(漢代) 이후 유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를 선사(先師)로 올려 함께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위(魏)ㆍ수(隋)ㆍ당(唐) 이후로는 공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배향하여 석전을 올렸다. 명(明)나라에 이르러 태학(太學)내에 설치된 공자의 사당인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여 문묘제례는 이러한 문묘에서 석전을 올리는 것으로 정착 되었다. 즉, 순ㆍ우ㆍ탕ㆍ문왕을 선성으로 제사 지내던 것이 공자의 등장 이후 유교의 입지가 본격적으로 확립되면서 공자와 함께 모셔지다가 나중에는 유교가 사회질서 전반을 지배하게 되면서 공자와 그의 제자를 위시한 유교적 성현들을 위해 제사 지내는 것으로 석전의 대상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Kim, 2010).

이러한 석전 봉행의 근거를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서도 찾을 수 있다.

- 봄에 입학하여 선사(先士)에게 석채(釋菜)하고 합무(合舞)한다.1)
- 중춘절(仲春節) 상정(上丁)에 석채하고 습무(習舞)한다.2)
- 봄과 여름에 교관이 선사(先師)에게 석전을 드리고, 가을과 겨울에도 이와 같이 한다. 처음으로 학교를 세운 자는 반드시 선성ㆍ선사에게 석전을 드리는데 그 제례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폐백을 드린다. 석전제에는 반드시 합악(合樂)을 하되,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것을 그만둔다.3)

석전은 교학(敎學)과 예악(禮樂)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의 기능과 선성ㆍ선사에게 그 덕을 칭송하는 제사를 봉행하는 제의(祭儀)의 기능을 동시에 함으로써 그 문화정신과 예술정신을 이어가는 종합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고 있다(Choi, 2005).

우리나라 문묘제례의 시작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묘 제례가 문묘에서 이루어졌고 국가 교육기관 내에 문묘를 설치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국가 교육기관의 설립과 함께 문묘제례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 되었다. 백제의 태학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한(漢)에서 비롯된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도 태학과 같은 국가 교육기관이 존재했으며 여기에서 석전제례가 이루어졌음을 추측 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9년(640) 당(唐)에 유학생을 파견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의 국학에서 석전의식을 참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설립 되었고 이후 성덕왕 16년(717)에는 공자와 제자들의 영정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신라에서도 일찍이 석전제례가 이루어 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Cha, 2014).

고려 현종 11년(1019) 최치원의 문묘 배향(配享) 이후 우리나라 성현을 문묘에 함께 배향하기 시작하였다. 현종 13년(1021)에 설총이, 충숙왕 6년(1319)에 안향(安珦)이 종사(從祀)되었다. 조선에서는 고종 20년(1883)에 김집(金集)이 마지막으로 문묘에 배향되면서 동국(東國) 18현(賢)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가 문묘에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현재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자(子思子)ㆍ맹자(孟子)의 4성(聖)과 그 외의 제자 공문10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과 함께 동국 18현의 위패가 종향(從享)되어 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문묘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국가의 상징인 종묘와 사직을 건립하였다. 태조 7년(1398)에 성균관(成均館)이 준공되었으나 정종 2년(1400)의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70)에 다시 건립되었다. 그 뒤로 개보수를 거쳐 성종 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다시 소실되었으며 선조 35년(1602)에 대성전(大成殿)이, 선조 39년(1606)에 명륜당(明倫堂)이 재건되었다. 마지막으로 고종 6년(1869)에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고 현재는 사적 제 143호로 지정되어 성균관대학교 교내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 석전대제는 공자의 기일과 탄강일을 기념하여 각각 음력 5월 11일과 9월 28일 두 차례 봉행되고 있는데 성균관의 대성전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향교에서 같은 날 일제히 치러지고 있다. 본래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봉행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다.

<Table 2> 
Type of Yukdaedaemu and dance props
Yukdaedaemu
(六代大舞)
Object
(對象)
Dance props
(舞具)
Civil dance
(文舞)
Hamji (咸池) the spirits of the terrain (地祇) the sleeves without props (衣袖)
Daeso (大韶) the spirits of the four directions (四望) the pipe of phoenix (鳳簫)
Daeha (大夏) the spirits of mountains and streams (山川) the pipe and pheasant feathers (籥, 翟)
Military dance (武舞) Unmun (雲門) the gods of heaven (天神) the five colors flags (五色旗)
Daeho (大濩) the departed mother (先妣) the oxtail fur (旄)
Daemu (大武) the ancestors (先祖) the shield and axe (干, 戚)

2. 문묘제례 일무의 유래

전통적인 제사의식에는 악(樂)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유학의 개념 안에서 악(樂)은 악(樂)ㆍ가(歌)ㆍ무(舞)가 합쳐진 총체적인 개념을 뜻한다. Geum(2000)에 의하면 문묘제례에 수반되는 문묘제례악은 ‘악(樂)’을 통한 예악사상의 구체적인 예술적 표현방식이며 따라서 악(樂)은 유교적 예악사상과 함께 항상 병존한다. 유교 의례악은 유교사상과 통치이념을 전달하는 유용한 매개체가 되었으며 이 점은 의례가 유교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제사에는 음식과 술을 올리고 의례절차에 따라 음악의 연주, 덕업(德業) 찬양의 노래와 이에 어울리는 춤을 추는데 이러한 악(樂)ㆍ가(歌)ㆍ무(舞)를 바로 의례(儀禮)의 시청각적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제사에 동반되는 춤을 일무(佾舞)라고 하는데 일무는 열(列)을 지어 춤을 추는 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 일무의 역사는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주(周)대에 이르러 그 형식적 발전이 이루어 졌으며, 특히 행(行)과 열(列)을 맞추어 대형을 만드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Im(2006)에 의하면 주(周)대에 정립된 여섯 가지의 춤인 육대대무(六代大舞)는 모두 무팔일(舞八佾)이라 하여 여덟 줄의 팔일무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육대대무는 이미 상고시대부터 고대 황제들의 공(功)과 덕(德)을 칭송하기 위해 추어졌던 춤으로 하(夏), 은(殷), 주(周)왕조를 거치면서 그 형태가 정립되었다. 『주례』에 위하면 <운문(雲門)>은 천신(天神)에게, <함지(咸池)>는 지기(地祇)에게, <대소(大韶)>는 사망(四望)에, <대하(大夏)>는 산천(山川)에, <대호(大濩)>는 선비(先妣)에게, <대무(大武)>는 선조(先祖)에게 제사 할 때 각 각 추어졌다. 이는 모두 천자의 예를 갖추는 춤으로 64명이 팔일(八佾)의 형식을 갖추어 추어졌다.

육대대무는 모두 도구를 들고 춤을 추었는데 <운문>은 오색기를 들고 춤을 추었으며, <함지>는 무구 없이 옷소매만을 사용했으며, <대소>는 봉황을 상징으로 만든 봉소(鳳簫)를 들고 춤을 추었다. <대하>는 왼손에 약(籥)을 들고 오른손엔 적(翟)을 들었으며 <대호>는 소의 꼬리털로 만든 모(旄)를 들었으며, <대무>는 왼손에 방패를 상징하는 간(干)을 들고 오른손엔 도끼를 상징하는 척(戚)을 들고 춤을 추었다.

<함지>, <대소>, <대하>는 문덕(文德)을 상징하는 문무(文舞)이고, <운문>, <대호>, <대무>는 무덕(武德)을 상징하는 무무(武舞)이다. 이 중 <대하>, <대무>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다. 명(明)대의 법률가이자 음악가인 주재육(朱載堉, 1536~1611)에 의해 육대대무가 모두 무보로 그려진 육대소무보(六代小舞譜)가 남겨졌다(Im, 2011).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교제례는 유교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일무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례의 대상인 신위(神位)의 신분적 존비(尊卑)와 제사를 올리는 실행자의 존비에 따라 음악의 규모는 물론 일무의 규모도 달라졌는데 일무는 그 행과 열의 수를 달리 하는 것으로 신분의 차이를 표현하였다.

그에 따라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신위를 대상으로 하는 제사에는 여덟 줄의 팔일(八佾)무를 올렸고 그 아래 신분부터는 두 줄씩 줄여 제후(諸侯)는 육일(六佾), 대부(大夫)는 사일(四佾), 사(士)는 이일(二佾) 등으로 춤의 규모를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무의 규모에 관하여 복건(服虔)과 두예(杜預)의 두 가지 방식4)이 있었다. 복건은 8열의 기준은 그대로 두고 항의 수만 줄이는 형태를 주장하였다. 복건의 주장에 따르면 팔일무는 8열8항으로 64명이 춤추며, 육일무는 8열6항으로 48명이 춤추며, 4일무는 8열4항의 32명이 춤추며, 이 일무는 8열2항의 16명이 춤춘다. 그렇기 때문에 춤의 대형은 신분의 차이 따라 폭만 좁아져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보인다. 반면 두예는 열과 항을 동일하게 줄여나가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팔일무는 8열8항의 64명이 춤추며, 육일무는 6열6항의 36명이 춤추며, 사일무는 4열4항의 16명이 춤추며, 이일무는 2열2항의 4명이 춤춘다. 그렇기 때문에 춤의 대형은 정사각형이며 신분의 차이에 따라 열과 항이 같은 비율로 줄어든다. 이 두 가지 방식은 왕조별로 다르게 채택되었지만 본래 일무는 여덟 사람을 기준으로 대열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복건의 방식에 더 무게가 실린다고 할 수 있다(Im, 2011).


Ⅲ. 조선 초기 문묘제례 일무의 복식
1. 조선 초기 문묘제례의 발전과 복식

우리나라에서 문묘제례의 시작은 고구려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태학(太學)의 설립에 따른 추측일 뿐 문묘제례와 일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우리나라 문묘제례 일무에 관한 최고(最古)의 기록은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宋)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도입했다는 기록으로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이 당시의 『송사(宋史)』를 살펴보면 아악기와 함께 악보와 의물 일습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Song, 2007).

이때 들여온 대성아악과 악기, 기물, 복식 등이 문묘제례에 계속 사용되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악기의 편성도 달라지고, 아악(雅樂)과 향악(鄕樂)이 혼합되어 사용되는 등 도입시기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하였다. 고려는 불교가 지배적인 사회 이념이었고 오랜 무신정권 등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들과 맞물려 문묘제례가 제대로 지켜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개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교 제례의 정리가 필요하였고 문묘제례와 일무도 이때 새롭게 정립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음악 기관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고려 말의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가 그대로 이어졌는데 아악서에서는 문묘제례의 아악을 주관하였고 전악서에서는 향악과 당악 등의 속악과 행정(行政)을 주관하였다. 이후 태종 9년(1409)에 아악서와 전악서를 병합하여 장악원(掌樂院)으로 개편하였다.

장악원에 속한 악생(樂生)은 제례의식에서 등가(登歌)의 노래, 아악 연주,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담당하였고 악공(樂工)은 공인(工人)이라고도 불렸으며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였다. 악공은 기본적으로 공천(公賤)에서 선발하였다. 이러한 악생과 악공을 이끄는 음악감독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악(典樂)인데 행정업무와 함께 연주 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박악사(執拍樂師)의 역할도 하였다.(Song, 2001)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조선 초기 문묘제례의 일무 복식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1392) 8월의 기사5)에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문묘에 석전제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조선이 개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불완전하게 남아 있는 고려의 문묘제례를 답습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문묘제례의 정비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태조 4년(1395) 11월의 기사6)에 따르면 사직과 원구단, 문묘제향의 악장은 그대로니 개작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태조 6년(1397)7)에 문묘가 새롭게 설립되었다. 태종 5년(1405) 4월 기사8)에는 조묘(祖廟)와 사직(社稷), 적전(籍田), 문묘(文廟) 등의 제사에 사용되는 배신(陪臣)의 제복, 악기 등의 물건이 파손되어 명(明)에서 새로 구입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듬해 악기를 새로 구입해왔으며 태종 7년(1407)9)에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가 완성되었다.

세종 12년(1430) 2월의 기록10)을 보면 박연(朴堧)이 의례와 관련하여 예조에서 상의한 여러 가지 건의가 나오는데 일무의 제도와 위치, 복식, 무용수 등에 관한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의 논의를 살펴보면 당시 무무(武舞)에서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고대에 제왕이 춤을 추던 제도를 고치지 않은 것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고려는 내적으로는 황제국을 칭했던 나라로 제신들도 조복으로 면관과 장복을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이 고려에서는 문제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은 철저히 대국에 사대의 질서를 지킨 나라로 이러한 유속(遺俗)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무무(武舞)를 추는 무인(舞人)에 형조와 의금부에서 퇴직한 나이 든 사람들이 섞여 있어 보기 좋지 않으니 무예가 있는 젊을 사람들을 뽑아 무무(武舞)를 추게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로서 당시 무무(武舞)의 무인(舞人)은 전악에 속한 악생이 아니고 실제 무관(武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악공(樂工)의 옷은 붉은색으로 염색한 오승(五升)의 거친 베로, 문무(文舞)의 옷은 붉은색으로 염색한 육승(六升)의 목면으로, 무무(武舞)의 옷은 검정색으로 염색한 오승(五升)의 거친 베로 만들었으며 옷의 크기도 짧거나 좁아 제 각각이고 제도에 맞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악공(樂工)과 무무(武舞)의 포는 5승의 거친 베로 만든 반면 문무(文舞)의 포는 6승의 목면으로 제작하여 역할에 따라 색상은 물론 복식재료에도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발은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데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으며 개수도 모자라 실제 행사에는 사용할 수가 없어 격에 맞지 않는 신발을 임의로 신거나 맨발로 나온다는 내용이 있다. 연향이나 정재, 나례의 복식은 화려하나 그에 비해 문묘제례 일무의 복식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관리도 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개정을 건의 하고 있다.

이로서 당시 문묘제례의 악생(樂生)과 무인(舞人)의 복색이 다른 제사에 동원되는 것에 비해 현저히 초라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을 정리하면 <Table 3>과 같다.

<Table 3> 
Munmyojere Ilmu costume before the reorganization by king Sejong
Costume Akgong (樂工) Civil dance Military dance
Hat Heukpodugeon
(黑布頭巾)
the same with Military Dance Pyeongmyeongwan
(平冕冠)
Robe Hongoseungchupoeui
(紅五升麤布衣)
Hongyoukseungmokmyuneui
(紅六升木緜衣)
Heukoseungchupoeui
(黑五升麤布衣)
Shoes the same with Military Dance Heukpiri
(黑皮履)

세종 12년(1430) 2월의 건의에 대한 보완책을 세종 15년(1433) 3월11)에 다시 건의하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악공의 관을 당(唐)ㆍ송(宋)의 제도에 따라 흑포두건(黑布頭巾)에서 개책관(介幘冠)으로 바꿀 것을 건의 하였다. 문무(文舞)의 관은 진현관(進賢冠)으로, 무무(武舞)의 관은 피변(皮弁)으로 바꿀 것을 건의 하고 있다.

표의(表衣)에 관해서는 당시의 포의(布衣)착용이 맞지 않으니 의(衣) 형태의 포의(布衣)를 당ㆍ송의 제도인 난삼(鸞衫)에 의거하여 삼(衫)의 형태로 바꿀 것과 재료 또한 거친 베나 면포가 적당하지 않으니 9승(升)의 명주로 제작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악공과 무인(舞人)들의 복식은 원래 방색(方色)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만들어야 하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으므로 악공은 붉은색을 사용하고 무인(舞人)은 모두 검은색을 사용하게 하고 협률랑(協律郞)은 제복(祭服)을, 전악(典樂)은 비공복(緋公服)을 입게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검은색의 난삼을 조의(皂衣)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현재 대(帶)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악공이 임의로 가는 띠를 착용하는데 당ㆍ송의 제도에 따라 무인(舞人)은 혁대(革帶)를, 악공은 말대(秣帶)를 사용하도록 하며 신발 역시 옛 제도에 따라 흑피리(黑皮履)를 신게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다음으로 세종 16년(1434) 1월의 기록12)을 보면 악공의 관복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의 제사에서 착용하는 악공들의 관복을 그대로 사직원단,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우사단(雩祀壇), 문묘(文廟) 등 각처에 통용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각 처마다 관복을 따로 만들라는 건의가 있었다. 또한 당상 공인들의 옷은 명주로 만들며, 당하 공인들의 옷은 면포를 사용하게 하라는 언급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새로 건의된 문묘제례 일무 복식에 관한 부분을 표로 정리하면 <Table 4>와 같다.

<Table 4> 
The proposed of revision of Munmyojere Ilmu costume
Costume Akgong Civil dance Military dance
Hat Gaechaekgwan (介幘冠) Jinhyeongwan (進賢冠) Pibyeon (皮弁)
Robe Biransam (緋鸞衫) Joeui (皂衣) Joeui (皂衣)
Belt Maldae (秣帶) Hyeokdae (革帶) Hyeokdae (革帶)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문묘제례 일무 복식 관련 기사를 살펴본 결과 조선 개국 초기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상태와 이의 개정을 위한 고증의 결과를 찾아 볼 수 있었다. <Table 3>과 같이 당시 일무에서는 모두 평면(平冕) 을 쓰고 검은색과 붉은색의 포의(布衣)를 착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를 대체할 복식을 고증하여 <Table 4>와 같이 제시하였다. 고증의 결과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문무(文武)에 따른 붉은색과 검은색의 표의(表衣) 색상 구분이 문무(文武)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되었으며 이점이 속악 일무와는 크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유습의 평면(平冕)을 문무(文舞)는 진현관(進賢冠), 무무(武舞)는 피변(皮弁)으로 고증하였다.

3.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나타난 조선 초기의 문묘제례 일무 복식

『악학궤범』은 성종 24년(1493)에 왕명에 의해 제작된 악전(樂典)으로 『오례의(五禮儀)』를 비롯하여 세종조와 성종조의 악인(樂人) 복식이 실려 있다. 총 9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문묘제례 일무복식과 관련하여 제 2권 아악진설도설(雅樂陳設圖說)에 복식의 구성이 나오고 제 9권 관복도설(冠服圖說)에 그림이 나온다.

먼저 오례의(五禮儀)부분에는 악생(樂生)과 악사(樂師)의 복식만 나오고 일무 복식에 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성종조(時用) 부분에서는 악생(樂生)과 일무의 복식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이때의 일무 복식은 세종조의 문무(文舞)인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문무악생(文武樂生)은 청란삼(靑鸞衫)대신 조주삼(皂紬衫)을 입는다고 설명하고 있어 문무(文武) 무인(舞人)의 표의가 세종조 문무(文舞)인의 청란삼(靑鸞衫)과 동일한 형태의 검은색 조주삼(皂紬衫)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世宗朝) 회례연(會禮宴) 부분을 살펴보면 악공의 관복은 아악과 같았다고 하고 있다. 일무 복식에 관해서는 문무(文舞)의 무인(舞人)은 둑(纛) 2인 포함 모두 50인이었으며 모두 진현관(進賢冠)을 착용하였고, 청란삼(靑鸞衫), 백주중단(白紬中單), 백주군(白紬裙), 금동혁대를 착용하고 백포말(白布襪), 오피리(烏皮履)를 신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무(武舞)의 무인(舞人)은 정(旌) 2인과 의물(儀物) 8인 포함 모두 58인이었다. 무인(舞人) 48인과 정(旌) 2인은 모두 피변(皮弁)을 썼고, 비란삼(緋鸞衫), 황화갑(黃畵甲), 표문대구고(豹文大口袴), 기량대(起粱帶)를 착용하고 백포말(白布襪)과 오피리(烏皮履)를 신었다. 의물(儀物) 8인은 홍말액(紅抹額)과 무변(武弁)을 썼고, 비란삼(緋鸞衫), 백주중단(白紬中單), 백주고(白紬袴), 금동혁대(金銅革帶), 홍금비구(紅錦臂鞲)를 착용하고 백포말(白布襪)과 오피리(烏皮履)를 신었다.

그러나 세종조 회례연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는 일무 복식은 정대업과 보태평에 수반되는 속악(俗樂) 일무의 복식이다. 회례연은 설날과 동지(冬至)에 국왕과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하는 큰 연회로서 제례는 아니지만 모두 모인 연회에서 새로 정리한 제례악을 선보이기 위해 연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아악 일무의 복식에 비해 문무(文武)의 구분이 있는 속악 일무의 복식이 더 화려해 속악 일무를 추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회례연의 성격상 공자와 유학성인을 위한 아악 일무보다는 역대 왕에게 올리는 속악 일무가 더 어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조 회례연은 제례악과 일무가 연행된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악학궤범』에 나타난 문묘제례 일무 복식을 표로 정리하면 <Table 5>와 같다.

<Table 5> 
Munmyojere Ilmu Costume of 『Akhakgoebeom』
Dancer Costume
Hat Robe Inner Robe Pants Belt Socks Shoes
Sungjongjo
(時用)
Civil dance Jinhyeongwan
(進賢冠)
Jojusam
(皂紬衫)
Baekjujungdan
(白紬中單)
Baekjugun
(白紬裙)
Geumdongh yeokdae
(金銅革帶)
Baekpomal
(白布襪)
Opiri
(烏皮履)
Military dance Pibyeon
(皮弁)
Jojusam
(皂紬衫)
Baekjujungdan
(白紬中單)
Baekjugun
(白紬裙)
Geumdongh yeokdae
(金銅革帶)
Baekpomal
(白布襪)
Opiri
(烏皮履)
Sejongjo hoireyeon
(世宗朝會 禮宴)
Civil dance Jinhyeongwan
(進賢冠)
Chungnansam
(靑鸞衫)
Baekjujungdan
(白紬中單)
Baekjugun
(白紬裙)
Geumdongh yeokdae
(金銅革帶)
Baekpomal
(白布襪)
Opiri
(烏皮履)
Military dance Pibyeon
(皮弁)
Biransam
(緋鸞衫)
Hwanghwagap
(黃畵甲)
Baekjujungdan
(白紬中單)
Pyomundaegugo
(豹文大口袴)
Giryangdae
(起粱帶)
Baekpomal
(白布襪)
Opiri
(烏皮履)
Military dance props
(武舞儀物)
Hongmalaekm ubyeon
(紅抹額武弁)
Biransam
(緋鸞衫)
Hounggumbigu
(紅錦臂鞲)
Baekjujungdan
(白紬中單)
Baekjugo
(白紬袴)
Geumdongh yeokdae
(金銅革帶)
Baekpomal
(白布襪)
Opiri
(烏皮履)

『악학궤범』을 통해 살펴본 결과 조선 초기에는 속악 일무의 문무(文舞)복식을 아악 일무의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복식에 관모와 의물을 제외하고 그대로 적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종묘제례 일무의 문무(文舞)는 청색의 청란삼(靑鸞衫)을, 무무(武舞)는 붉은색의 비란삼(緋鸞衫)을 착용했고 문묘제례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모두 검은색의 조주삼(皂紬衫)을 착용하여 표의의 색상이 달랐음이 나타난다. 종묘제례 일무 복식의 경우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의 칭송이 달랐으므로 이를 확연하게 구분하기 위해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색이 달랐으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경우 제사의 대상이 유학 성인 이었으므로 무덕(武德)의 강조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음양(陰陽)의 조화를 위한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의 구분이 있었기 때문에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식 차이는 관모와 의물에서만 보였다.

『악학궤범』나타난 문묘제례의 일부 복식을 도식으로 정리하면 <Table 6>과 같다.

<Table 6> 
Munmyojere llmu Costume lllustration in 『Akhakgwebeom』
Hat Robe
Civil dance
<Fig. 1> Jinhveongwan
Military dance
<Fig. 2> Pibyeon

<Fig. 3> Jojusam
Belt

<Fig. 4> Geumdonghyeokdae
Inner Robe Pants

<Fig. 5> Baekryeongjungdan
or
<Fig. 6> Baekjujungdan

<Fig. 7> Baekjugo
Socks Props of civil dance Props of military dance

<Fig. 8> Baekpomal

<Fig. 9> Yak

<Fig. 10> Jeok

<Fig. 11> Gan

<Fig. 12> Cheok
Shoes

<Fig. 13> Opiri
(illustration form http://www.culturecontent.com)

4. 조선 초기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실증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려는 불교 중심의 사회분위기와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武臣政權)으로 인하여 유교식 의례문화가 발전하지 못하였고 형식과 절차뿐만 아니라 악기, 악장, 의물, 복식 등 여러 부분에서 혼란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유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에서는 이에 맞는 유교식 의례의 정립이 시급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러한 유교적 상징성을 지닌 문묘제례의 정립이 시급했다. 태조부터 시작된 전례악의 정비가 태종대에는 예전(禮典)의 편찬사업으로 이어졌고 세종대에는 예제의 확립과 함께 아악이 정비되었으며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ㆍ봉래의(鳳來儀)ㆍ발상(發祥) 등의 속악이 창제되었다. 이후 성종 5년(1474)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완성되었으며 성종 24년(1493) 『악학궤범(樂學軌範)』이 편찬되기에 이른다.(Yu, 2015) 이로써 조선 초기의 예악에 관한 기초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세종대에 확실한 아악과 속악의 구분이 확립되었고 당시 중국에서도 사라지고 있던 아악을 정비하여 악기와 음률을 고증하였다. 이러한 아악을 문묘제례악에 사용함으로서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조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반면 종묘를 비롯한 회례연 등의 대내적으로 중요한 의례에서는 새롭게 창제한 속악을 사용함으로서 자주성을 보이고자 하였으며 앞으로 이어질 조선의 예악사상을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조선왕조실록』기록과 『악학궤범』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초기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혼란했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면모와 이를 바로잡을 고증의 결과를 살펴볼 수 있었고 『악학궤범』에서는 이러한 고증을 실제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정리하여 조선 초기 문묘제례의 일무 복식 구성을 실증하면 다음과 같다.

a. 문무(文舞) 일무(佾舞) 복식
   -관모: 진현관
   -표의: 조주삼
   -중의: 백주중단(『악학궤범』) 또는 백령수중의(『조선왕조실록』)
   -하의: 백주고
   -대: 금동혁대
   -버선: 백포말
   -신발: 오피리
   -의물: 약, 적

b. 무무(武舞) 일무(佾舞) 복식
   -관모: 피변
   -표의: 조주삼
   -중의: 백주중단(『악학궤범』) 또는 백령수중의(『조선왕조실록』)
   -하의: 백주고
   -대: 금동혁대
   -버선: 백포말
   -신발: 오피리
   -의물: 간, 척

1) 관모(冠帽)

문묘제례의 일무 복식은 관모와 의물에서만 차이를 두고 나머지 복식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같았다. 기존의 격에 맞지 않았던 평면(平冕)을 대체하여 문무(文舞)에는 진현관(進賢冠)을, 무무(武舞)에는 피변(皮弁)을 착용하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이 두 관모는 종묘제례 일무에서 착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연은 문무(文舞)의 관(冠)을 진현관(進賢冠)으로 고증하고 있다. 당(唐)에서는 위모관(委貌冠)을 썼고, 송(宋)에서는 평면(平冕)을 썼는데 송(宋)의 평면(平冕)은 잘못된 유습이기 때문에 당(唐)의 위모관을 문무(文舞)의 관으로 착용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위모관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13)에 진현관이 주나라 위모관의 유상(遺像)이라는 주해(註解)에 따라 진현관을 문무(文舞)의 관(冠)으로 고증하였고 이러한 진현관의 구체적인 모습을 송(宋)의 섭숭의(聶崇義)가 편찬한 삼례(三禮)의 도해서(圖解書)인 『삼례도(三禮圖)』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 나온 진현관의 높이를 낮춰 사용할 것을 건의 하고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실려 있는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에는 <Table 7>과 같이 위모의 4가지 형태(일련번호는 연구자의 구분)가 나오며 이중 2번째 위모관에 진현관과 같다는 주해가 달려 있다. 따라서 박연은 이를 참고하여 진현관을 고증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가 <Fig. 1>과 같이 『악학궤범』에 나온다. 또한 『삼례도집주』에 따르면 그 크기가 앞의 높이는 7촌(寸), 뒤의 높이가 3촌(寸), 끈의 길이가 8촌(寸)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진현관의 설명에 그림이 3개가 실려 있고 착용자의 신분에 따라 양의 개수가 다르다고 설명되어 있다.14)<Table 8>

<Table 7> 
Wimogwan on the 『Samryedojipju』

<Fig. 14> Wimogwan 1

<Fig. 15> Wimogwan 2

<Fig. 16> Wimogwan 3

<Fig. 17> Wimogwan 4

<Table 8> 
Jinhyeongwan on the 『Samryedojipju』

<Fig. 18> Jinhyeongwan1

<Fig. 19> Jinhyeongwan2

<Fig. 20> Jinhyeongwan3

이를 통해 문무(文舞)의 관모로 방형(方形)을 기본으로 한 진현관에 양(梁)이 장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의 고증에 따르면 무무(武舞)의 관은 당(唐)ㆍ송(宋)에서도 모두 평면(平冕)을 착용하였지만 진양(陳暘)이 무인(舞人)의 복식에 면관은 맞지 않다고 비판하며 문무(文舞)에는 작변(爵弁)을 쓰고, 무무(武舞)에는 위변(韋弁)을 착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음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진양의 의견에 따라 무무(武舞)의 관으로 피변(皮弁)을 착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Kim(2009)에 의하면 변(弁)은 남자의 예관(禮冠)으로 피변(皮弁), 위변(韋弁), 작변(爵弁), 관변(冠弁) 등 다양한 종류의 명칭과 형태를 갖고 있는데 『중국의관복식대사전(中國衣冠服飾大辭典)』에 나타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피변은 사슴 가죽을 취하여 만든 관이고, 위변은 군사용 고깔로 모양은 피변과 같다. 작변은 류(旒)가 없는 면관(冕冠)을 뜻한다.

이는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에 나온 위모관의 형태처럼 피변도 여러 형태의 분파<Table 9>가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고려의 유습인 면관이 작변의 형태였고 이를 개정하여 사슴가죽으로 만든 고깔 형태의 피변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피변은 『악학궤범』의 도식<Fig. 2>에 나오는데 다만 종이로 만들고 사슴가죽의 무늬를 그려 넣었다. 이는 무무(武舞)의 피변이 일종의 무대복식으로 관리의 예관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다음의 <Fig. 25>, <Fig. 26>은 본 연구자가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고증 제작한 종묘제례 일무 문무(文武)의 관이다.

<Table 9> 
Various type of Byun
『Samryedojipju』 『Samjaedohoe』

<Fig. 21> Pibyun

<Fig. 22> Gwanbyun

<Fig. 23> Jakbyun

<Fig. 24> Pibyun
(http://ourartnet.com/Siku_01/0129/0129_123_083/0129_123_083.htm) (http://archive.org/stream/02098330.cn#page/n4/mode/2up)


<Fig. 25> 
Jinhyeongwan for Civil dance of Jongmyojerea (reproduced work by researcher)


<Fig. 26> 
Pibyeon for Military dance of Jongmyojerea (reproduced work by researcher)

종묘제례와 문묘제례 일무(佾舞)의 관모가 같았으므로 조선 초기 문묘제례의 관모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 표의(表衣)

문무(文武)에서 모두 표의로 검정색의 조주삼(皂紬衫)을 착용하였는데 『악학궤범』에서 그 형태는 비란삼, 청란삼과 같았다고 하였으며 관복도설에 그 도식<Fig. 26>이 나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연은 당시 착용되던 악공 복식의 표의가 의(衣)의 제도이며 삼(衫)의 제도를 따르고 있지 않으니 송(宋)의 난삼(鸞衫)의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난삼(襴衫)은 Lee(1978)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고대복식인 심의(深衣)에서 비롯된 것으로 심의에 란(襴)과 거(裾)를 붙여서 만들었고 당(唐) 초기에 사인(士人)이 착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송사(宋史)』의 여복지(輿服志)에 백세포(白細布)로 만들었고 둥근 깃과 넓은 소매가 달렸으며 허리사이에 벽적(辟積), 즉 주름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삼재도회』의 도식을 살펴보면 소매 끝과 깃, 도련에 선이 둘러진 단령의 형태이며, 『사례찬설(四禮纂說)』에 따르면 난삼(襴衫)은 송(宋) 국자감(國子監)의 유생(儒生)이 착용하던 남색 비단에 검은색 또는 푸른색의 4~5치 정도의 단을 댄 둥근 깃의 옷으로 허리사이에 주름이 있는 옷과는 형태면에서 거리가 있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난삼(襴衫)은 그 색상을 달리하여 관례(冠禮)나 상례(喪禮)의 예복으로도 사용되었으며 과거(科擧) 급제자의 예복인 앵삼(鶯衫)으로 발전하였다. 즉 난삼(襴衫)은 선이 둘러진 단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학궤범』에 나타난 비란삼(緋鸞衫), 청란삼(靑鸞衫), 조주삼(皂紬衫)에는 선 장식이 없어 박연이 언급한 난삼(鸞衫)이 이러한 선이 둘러진 난삼(襴衫)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복(公服)인 단령의 형태를 난삼(鸞衫)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난삼(鸞衫)의 난(鸞)은 중국에서 상상의 새인 난새를 뜻하는 것으로 난삼(襴衫)에서 발전한 과거 급제자의 예복인 앵삼(鶯衫)의 명명(命名) 방식과 비슷하다.

즉, 고려 말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은 박연이 제시한 난삼(鸞衫) 제도에 따른 단령 형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악학궤범』에는 삼(衫), 의(依), 단령(團領)의 명칭이 사용된 여러 형태의 단령이 나온다.

녹초삼(綠綃衫)<Fig. 27>, 홍주의(紅紬衣)<Fig. 28>, 남주의(藍紬衣)<Fig. 29>, 흑단령(黑團領) <Fig. 30>은 모두 둥근 깃의 단령이지만 소매와 무의 형태가 각기 다르다. 녹초삼은 광수(廣袖)의 단령이고 홍주의는 진동 넓이의 소매가 달린 단령이다. 남주의는 진동너비의 소매가 수구로 갈수로 좁아지는 형태이며 녹초삼, 홍주의와 함께 진동 밑으로 삼각형으로 보이는 무가 달려있다. 그러나 삼각무인지 뒤로 젖혀진 사각무 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흑단령도 남주의와 같이 좁은 소매지만 직선이 아닌 곡선 형태이며 사각무가 밖으로 나와 있는 단령의 형태이다. 또한 흑단령은 단령의 명칭을 옷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Fig. 27> 
Nokchosam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28> 
Hongjueui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29> 
Namjueui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30> 
Huekdanryeong (http://www.culturecontent.com)

『악학궤범』에 나와 있는 문묘제례 일무 복식의 표의는 조주삼(皂紬衫)으로 그 형태가 악생(樂生)의 비란삼(緋鸞衫)과 같으며 비란삼은 악사(樂師)의 강공복(絳公服)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된 악사(樂師)의 비색공복(緋色公服)과 강공복이 같은 복식이다. 따라서 문묘제례 일무의 문무(文武) 복식인 조주삼은 공복 형태의 표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표의를 그림과 유물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Fig. 31>은 공민왕 초상으로 태조(太祖, 1335~1408)가 종묘 경내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光海君)때 다시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서 공민왕은 깃과 수구에 검은색 선이 둘러진 넓은 소매의 홍색 단령을 입고 있는데 박연이 언급한 난삼(鸞衫)이 이러한 선이 둘러진 단령이 아닌가 생각된다. <Fig. 32>는 태조의 어진으로 1900년에 이모(移模)한 것이다. 좌상이지만 진동너비의 좁은 소매와 밖으로 나온 무의 형태가 살짝 보인다. <Fig. 33>은 마천목(馬天牧, 1358~1431)의 초상으로 마천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올랐다. 이시기에 그려진 공신상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좁은 소매와 옆트임, 무의 주름이 확인된다. <Fig. 34>는 조선 전기 문신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의 초상화로 1471년(성종 2) 좌리공신3등(佐理功臣三等)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중종을 비롯한 많은 공신들의 초상을 잘 그렸던 노비 출신 학포(學圃) 이상좌(李上佐, ?~?)가 그린 것으로 전한다. 이 초상화에서도 역시 좁은 소매와 옆트임, 무의 주름이 확인된다.


<Fig. 31> 
Portrait of King Gongminwang of Goryeo (http://www.gogung.go.kr/searchList.do)


<Fig. 32> 
Portrait of King Taejo of Joseon (http://www.gogung.go.kr/searchList.do)


<Fig. 33> 
Portrait of Ma cheonmok (http://www.gogung.go.kr)


<Fig. 34> 
Portrait of Lee sungwon (http://www.yeongnam.com)

<Fig. 31>, <Fig. 32>, <Fig. 33>, <Fig. 34>는 여말선초 인물의 초상화로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가 확실치 않으며 또한 모두 좌상으로 복식의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목 가까이 달린 둥근 깃과 좁은 소매의 특징은 볼 수 있었다. 또한 안감과 안에 겹쳐 입은 옷의 색상이 보이며 옆트임과 무의 주름은 확실하지만 무의 완전한 형태는 확인하기 어렵다.

<Fig. 35>, <Fig. 36>, <Fig. 37>은 단령의 출토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Fig. 35>은 변수(邊修, 1447~1524)의 묘에서 출토된 단령으로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진동 너비의 소매가 달려 있는데 『악학궤범』의 흑단령 소매와 비슷한 형태이다. 진동에서 밑으로 내려온 부분에 사각무가 달려 있다. <Fig. 36>은 김흠조(金欽祖, 1461∼1528)의 묘에서 출토된 단령으로 변수의 단령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Fig. 37>은 고운(高雲, 1479∼1530)의 묘에서 출토된 단령으로 진동 너비의 소매가 달려 있고 무는 뒤로 젖혀져 달려 있는 형이다.


<Fig. 35> 
Danryeong of Byun, S. (NFMK, 2000, p. 52)


<Fig. 36> 
Danryeong of Kim, H. J. (Choi, 2000, p. 67)

<Table 10>의 도식화를 보면 변수묘 출토 단령과 김흠조 출토 단령의 무는 밖으로 나와 있지만 고운묘 출토 단령의 무는 뒤로 젖혀져 있어 앞에서는 삼각형의 무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무는 출토복식으로 살펴보면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발견된다. <Fig. 27>, <Fig. 28>, <Fig. 29>, <Fig. 30>의 『악학궤범』 도식과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형태는 흑단령이 변수묘 출토 단령, 김흠조 출토 단령과 비슷하다. 무의 형태는 녹초삼, 홍주의, 남주의와 고운묘 출토 단령이 비슷하다. 소매의 형태도 초상화와 출토 단령 모두 진동 너비의 소매였으나 녹초삼은 넓은 소매이고 홍주의는 그보다는 좁지만 진동 너비 보다 넓은 소매 폭을 하고 있다.

<Table 10> 
Illustration of Mu
Danryeong of Byun, S. Danryeong of Kim, H. J. Danryeong of Go, W.

<Fig. 38> Illustration of Mu

<Fig. 39> Illustration of Mu

<Fig. 40> Illustration of Mu
(Illustration from Choi, 2000, p. 66)

『악학궤범』의 조주삼(皂紬衫) 소매 끝에는 작은 한삼이 달려 있는데 이와 같은 형태의 소매를 볼 수 있는 유물로 김확(金穫, 1572~1653) 합장묘에서 출토된 동래 정씨(東萊鄭氏, 1567~1631)의 원삼(圓衫)<Fig. 42>이 있다. 이는 여성 단령이 원삼으로 변해가는 초기 형태의 옷으로 연구되고 있는데 소매의 끝에 작은 한삼이 달려 있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로 순흥 안씨(順興安氏, 1551~1609)의 단령<Fig. 41>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성용이며 이 단령에는 소매폭과 이어지는 한삼이 달려 있다. 조주삼과 비슷한 형태의 작은 한삼을 <Fig. 43>의 명(明)대 삼(衫)과 송(宋)의 신종(神宗) 황제 초상<Fig. 44>에서 발견할 수 있다. <Fig. 41>, <Fig. 42>, <Fig. 43>의 한삼은 소매에 부착된 형태로 보이고 <Fig. 44>의 한삼은 안에 입은 중단이나 저고리의 소매가 포의 소매 밖으로 길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


<Fig. 41> 
Danryeong of Sunheung An (DUSMM, 2009, p. 74)


<Fig. 42> 
Wonsam of Dongrae Jung (GPM, 2007, p. 31)


<Fig. 43> 
Sam of Ming Dynasty (Ko & Cho, 2015, p. 6)


<Fig. 44> 
Portrait of Sinjong of Song (NPM, 1971, p. 101)

다음으로 『악학궤범』의 조주삼(皂紬衫)은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가슴과 등, 양쪽 어깨에 난봉(鸞鳳)을 흉배처럼 그려 넣었다. 흉배는 관리의 등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세종 때 흉배의 사용이 건의 되었으나 실제 사용은 단종 때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악학궤범』에 나타난 조주삼(皂紬衫)의 난봉 그림은 흉배라기보다는 무대복식으로서의 화려함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난봉(鸞鳳) 그림의 위치 또한 배와 등에만 달게 되어 있는 흉배와 달리 양 어깨에 까지 그려져 있어 왕의 보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는 흉배의 영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 초기의 단령은 출토복식과 초상화를 통해 살펴볼 때 목 가까이 달린 둥근 깃과 진동너비 폭의 소매, 안팎으로 주름을 잡은 큰 무가 달린 형태적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악학궤범』에는 다양한 형태의 단령이 등장하며 문묘제례 일무의 조주삼은 넓은 소매와 뒤로 젖혀진 무가 달린 17세기 이후의 단령 양식과 비슷하여 조선 초기 출토 유물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는 『악학궤범』에 실린 복식이 일종의 무대복식으로서의 특수한 양상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공복(公服) 단령(團領)과 다른 다양한 넓이의 소매와 무의 형태는 고래(古來)로부터 있어 왔던 형태로 이를 적용하여 각 역할에 맞는 무대복식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악학궤범』이 15세기 말에 제작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복간, 그 후 1655년(효종 6)과 1743년(영조 19)에 각각 중간되었던 상황을 보면 여러 시대의 복식 양상이 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중단(中單)

『악학궤범』에서 문묘제례 일무 문무(文武)의 중의(中衣)는 악생ㆍ악공처럼 백주중단(白紬中單)<Fig. 6>을 착용하는데 앞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에 일무복식의 중단(中單)으로 흰색 깃이 달린 백령수중의(白領袖中衣)의 착용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백령수중의는 흰색의 깃이 달린 중단으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중단이 『악학궤범』의 관복도설에 무동(舞童) 중단(中單)으로 나오는데 무동중단(舞童中單)<Fig. 5>은 백주중단(白紬中單)과 달리 착수(窄袖)의 소매가 달려 있다.

앞서 조주삼의 소매 끝에 달린 작은 한삼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은 한삼의 기능이 실제 어떠한 것인지는 더욱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중단 또는 저고리의 긴 소매가 한삼의 역할을 하다가 겉옷에 따로 부착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악학궤범』의 조주삼(皂紬衫)에 보이는 짧은 한삼이 소매에 따로 부착된 형태인지 안에 입은 중단의 긴 소매가 밖으로 보이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만약 <Fig. 44>처럼 안에 입은 중단의 긴 소매가 밖으로 나온 것이라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무동의 중단처럼 착수의 긴 소매가 달린 중단을 착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4) 바지

문묘제례 일무의 문무(文武) 바지는 『악학궤범』에 의하면 말군(襪裙) 형태의 백주고(白紬袴)를 착용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속악의 무무(武舞)인 정대업에서 무인(舞人)은 표범 얼룩무늬가 그려진 표문대구고(豹紋大口袴)<Fig. 45>를 착용했다. 이외에 처용무는 군(裙)<Fig. 46>을 착용하였고 여기(女技)는 말군(襪裙)<Fig. 47>, <Fig. 48>을 착용하였는데 모두 말군의 형태였다. 바지에 관해 설명이 나오지 않는 역할을 제외하면 『악학궤범』에 나온 모든 바지는 말군형태였다.


<Fig. 45> 
Pyomundaegugo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46> 
Gun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47> 
Malgun (http://www.culturecontent.com)


<Fig. 48> 
Malgun (http://www.culturecontent.com)

말군은 허리끈에 바지의 가랑이가 치마 형태로 달려 있어 뒤가 열린 상태의 바지로 말을 탈 때 하의 위에 덧입어 치마나 포를 여미는 용도로 착장하였다. 말군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 2년(1420) 9월15)의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국상(國喪)시 매장전에 전(奠)을 올리는 의례인 천전의(遷奠儀)에 관한 기사에 장례의 염습용으로 백릉겹말군(帛綾裌襪裙)과 백저포말군(白苧布襪裙)이 나오며 이후 남녀의 기마(騎馬)시 덧입는 바지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이처럼 입었을 때 풍성하게 폭이 넓은 말군 형태의 바지를 일종의 무대의상으로 착용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백주고(白紬袴)와 표문대구고(豹紋大口袴)의 명칭은 바지를 뜻하는 고(袴)로 표기되고 백주군(白紬裙), 말군(襪裙), 군(裙) 등의 명칭은 치마를 뜻하는 군(裙)으로 표기되었다. 또한 백주고(白紬袴)와 표문대구고(豹紋大口袴)에는 버선이 달려 있고 백주군(白紬裙), 말군(襪裙), 군(裙)에는 버선이 달려 있지 않다. 이처럼 버선이 달려 있어 바지를 입은 형상을 나타내는 말군은 고(袴)의 명칭을 사용하고 버선이 달려 있지 않은 말군에는 군(裙)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백주고와 표문대구고가 착용되는 일무 복식에 따로 백포말(白布襪)이 포함돼 있어 이것이 이중으로 버선을 신는 것인지 그림 상 버선을 신은 상태로 표현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는 조주삼의 소매 끝에 달린 한삼처럼 더 연구가 필요하다.

<Fig. 49>는 노인 울라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경의 바지고 <Fig. 50>은 독일 북부에서 출토된 4세기 중반의 바지다. 이처럼 버선이 달린 바지가 고대부터 있었고 특히 말군은 <Fig. 49>의 바지를 허리끈에 단 형태여서 이러한 바지들과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Fig. 49> 
Trouser leg of Noin Ula (https://depts.washington.edu/silkroad/museums)


<Fig. 50> 
Barbarian trouser (https://upload.wikimedia.org)

5) 신발

『악학궤범』에 의하면 신발은 오피리(烏皮履)를 착용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연은 당시 악공이 착용하고 있는 신발을 검게 염색한 쇠가죽과 말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옛 제도에 맞게 검은 가죽신을 신고는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검은 가죽신을 흑위제(黑韋鞮)라고 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위서(魏書)』16)와 『통전(通典)』, 『송서(宋書)』17) 등에 그 명칭이 등장하여 흑위제는 고증에 의한 신발로 보인다. 이러한 흑위제가 『악학궤범』에서는 오피리(烏皮履)로 바뀌었다.

오피리(烏皮履)는 『통전(通典)』 「악현(樂懸)」 18)에 악공과 문무(文舞)의 무인(舞人)이 모두 착용한 것으로 나와 오피리(烏皮履) 역시 고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오피리(烏皮履)가 『수서(隋書)』 「예의(禮儀)」19)에는 예복의 신발로 나오며 왜 왕실의 8세기 법령인 『양로령(養老令)』 「의복령(衣服令)」에 의하면 조복(朝服)의 일습(一襲)에 포함되어 있어 원래는 예복의 신발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악공, 무인(舞人)의 신발이 조선 초기에 흑위제에서 오피리로의 변하였는데 흑위제의 형태를 알 수가 없어 그저 명칭이 달라진 것인지, 형태가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 하겠다.

오피리(烏皮履)는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끈이 달려 있어서 발등에 묶어 신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악학궤범』의 도식을 살펴보면 앞 코에 구름 문양이 있는데 운혜(雲鞋)처럼 표면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앞코에 장식이 있는 당(唐)대의 고두리(高頭履)와 비슷해 보인다. <Fig. 51>과 <Fig. 52>는 조선시대 수의용으로 사용된 습신의 출토품이다. 앞 코에 매듭 끈으로 된 장식이 달려 있다. <Fig. 53>은 정창원 소장의 신발이다. 당(唐)대의 고두리(高頭履) 양식이다. <Fig. 54>는 청(淸)대의 자수 신발로 앞코에 도드라진 구름문양이 입체적으로 자수되어 있다. 오피리(烏皮履)의 실제 모습도 이러한 신발들과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의 악인과 일무에서 모두 목화를 착용하고 있다.


<Fig. 51> 
Shroud shoes of Lee, J. S. (http://www.emuseum.go.kr)


<Fig. 52> 
Shroud shoes (http://www.emuseum.go.kr)


<Fig. 53> 
Shoes (http://shosoin.kunaicho.go.jp)


<Fig. 54> 
Shoes of Qing Dynasty (http://www.emuseum.go.kr)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기록에 따르면 관모(冠帽)와 의물을 제외한 종묘제례악 일무의 문무(文舞) 복식과 문묘제례악 일무의 문무(文武) 복식이 같다고 하였으니 조선 초기 문묘제례악 일무의 복식을 재현하면 <Fig. 55>와 비슷할 것으로 여겨진다. <Fig. 55>, <Fig. 56>은 연구자가 고증 제작했던 종묘제례악 일무의 문무(文武) 복식의 착장 모습이며 <Fig. 57>은 문묘제례악 일무 문무(文武) 복식 중 조주삼(皂紬衫)을 재현한 것이다.


<Fig. 55> 
Civil dance costume of Jongmyojere (reproduced work by researcher)


<Fig. 56> 
Military dance costume of Jongmyojere (reproduced work by researcher)


<Fig. 57> 
Jojusam for Munmyojere Ilmu (reproduced work by researcher)


Ⅳ. 결론

문묘제례는 유학 성현들의 유학적 사상과 덕행을 칭송하고 이를 익히고 흠모하기 위해 문묘에서 거행되는 제사의식이다. 이러한 문묘제례의 핵심적인 의의는 악가무의 통합적 개념인 ‘악(樂)’을 통하여 시청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제례의식의 절차마다 연주되는 음악과 악장은 청각적인 표현이며 일무는 시각적 표현인 것이다.

조선은 개국(開國)의 정당성을 유학적 이상사회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로 봉행된 조선 초기의 문묘제례는 사회통합과 정치적 당위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이 시기 문묘제례는 새롭게 정립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까지 이어져 중국에서도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 유교의례의 중심이 우리나라가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조선 초기의 문묘제례 일무 복식을 『조선왕조실록』과 『악학궤범』을 통해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고려 말의 제례악 복식은 관심과 관리의 소홀로 인하여 소량의 제례악 복식을 여러 제사에 돌려 착용하는 상황이었으며 그마저도 사정이 좋지 않아 의례 형식에 맞지 않았다. 거친 베와 면포로 의(衣)를 제작했으며 관으로는 고래로부터 전했다고는 하지만 평면(平冕) 을 착용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박연이 주도한 본격적인 고증 작업에 의해 악인(樂人)복식이 다시 제정되었다. 이때 속악 즉, 종묘제례의 문무(文舞)의 복식제도를 관모(冠帽)와 의물(儀物)에 차이를 두고 문묘제례의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식제도와 같게 제정하였다. 다만 색상의 차이를 두어 문묘제례 일무의 복식은 점정색의 조주삼(皂紬衫)을 착용하였다. 세 번째, 종묘제례와 달리 문묘제례의 일무에서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표의가 같았다. 이는 문묘제례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문덕(文德)을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음양의 조화에 따라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함께 연행했던 것으로 복식에 있어서 종묘제례 일무처럼 차이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 문묘제례 일무 복식을 살펴본 결과 현재 연행되는 일무의 복식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현재는 붉은색의 표의를 착용하는데 음악을 연주하는 악인(樂人)의 복식과도 색상이 같으며 현재 종묘제례의 일무복식과도 같아 제례의 종류에 따른 차별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신발은 모두 목이 긴 화(靴)를 신고 있으나 조선 초기에는 역할에 따른 다양한 신발이 존재 했었다.

조선 초기 새로 정립된 제례악 복식 제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합, 단일화되는 현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종묘가 199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함께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제례문화가 인류 문화를 위해 높은 보존가치를 지녔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맞물려 문묘제례 역시 세계무형문화에 등재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문묘제례가 유교문화권 국가에서 거의 사라진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역사와 전통이 이어져 그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무를 비롯한 몇몇 부분에서는 아직 완벽한 고증을 이루어내지 못한 모습들도 보이고 있다. 그 중 일무의 복식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무 및 악인의 복식 고증은 문묘제례의 완벽한 고증을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 중의 하나이며 시대별 변화에 따른 모습을 고증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문묘제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의 정비가 새롭게 이루어진 조선 초기 문묘제례의 일무 복식을 실증하였다. 이후 일무 복식의 시대별 고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본 연구가 문묘제례의 고증에 작은 기여가 되길 기대한다.


Notes
1) 『周禮』 「春官宗伯」 大胥, … 春入學 舍采合舞….
2) 『禮記』 「月令」, 仲春之月 … 上丁命樂正 習舞釋菜….
3) 『禮記』 「文王世子」, … 凡學春官釋奠于其先師 秋冬亦如之 凡始立學者 必釋奠于先聖先師 及行事必以幣 凡釋奠者 必有合也 有國故則否 ….
4) 일무의 열(列)과 행(行)에 대한 논의는 중국 서진(西晉)의 학자인 두예(杜預, 222~284)와 후한(後漢)의 학자인 복건(服虔, ?~?)의 서로 다른 의견에서 비롯되었다. 두예는 열과 행의 수를 갖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복건은 열은 8명으로 기준을 삼고 행만 변화시키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5) 太祖實錄, 太祖1年(1392) 8月8日.
6) 太祖實錄, 太祖4年(1395) 11月16日.
7) 太祖實錄, 太祖6年(1397) 6月2日.
8) 太宗實錄, 太宗5年(1405) 4月8日.
9) 太宗實錄, 太宗7年(1407) 3月21日.
10) 世宗實錄, 世宗12年(1430) 2月19日.
11) 世宗實錄, 世宗15年(1433) 3月22日.
12) 世宗實錄, 世宗16年(1434) 1月19日.
13) 송말(宋末)-원초(元初)의 진원정(陳元靚)이 엮은 생활문화 백과사전. 명대의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청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http://waks.aks.ac.kr/dir/searchView.aspx?dataID=3978@AKS-2012-EBZ-2101_DES)
14) 『三禮圖集注』, 券三, 舊圖云古三冠梁數雖異俱曰進賢前髙七寸纓長八寸後髙三寸一梁下大夫一命所服兩梁再命大夫二千石所服三梁三命上大夫公侯所服禮不記今案唐典三品已上三梁五品已上兩梁九品已上一梁臣崇義案漢明帝永平二年春正月辛未宗祀光武皇帝於明堂帝及公卿列侯始服冠冕衣裳玉佩絇屨以行事又漢官儀曰天子冠通天諸王冠逺遊三公諸侯冠進賢三梁卿大夫尚書二千石博士冠兩梁千石以下至.
15) 世宗實錄, 世宗2年(1420) 9月13日.
16) 『魏書』 卷一百九樂志五第十四…其祭天地宗廟:武舞執干戚,著平冕、黑介幘、玄衣裳、白領袖、絳領袖中衣、絳合幅袴袜、黑韋鞮;文舞執羽籥,冠委貌,其服同上。其奏於廟庭:〔二九〕武舞,武弁、赤介幘、生絳袍、單衣絳領袖、〔三0〕皂領袖中衣、虎文畫合幅袴、白布袜、黑韋鞮;文舞者進賢冠、黑介幘、生黃袍、單衣白合幅袴,服同上。
17) 『通典』 「樂序」, 『宋書』 志第9 樂1 …祀圓丘以下,武始舞者,平冕,黑介幘,玄衣裳,白領袖,絳領袖中衣,絳合幅蔥,絳<糹末>,黑韋鞮。咸熙舞者,冠委貌,其餘服如前。章斌舞者,與武始、咸熙同服。奏於朝廷,則武始舞者,武冠,赤介幘,生絳袍單衣,絳領袖,皁領袖中衣,絳合幅蔥,白布<糹末>,黑韋鞮。咸熙舞者,進賢冠,黑介幘,生黃袍單衣,白合幅蔥。此三舞皆執羽籥,其餘服如前。
18) 『通典』 「樂懸」 …宮懸登歌工人,皆介幘,朱連裳,革帶,烏皮履。…文舞六十四人,供郊廟,服委貌冠,玄絲布大袖,白練領褾,白紗中單,絳領褾,絳布大口蔥,革帶,烏皮履,白布襪。…武舞六十四人,供郊廟,服平冕,餘同文舞。
19) 『隋書』 「禮儀」 志七 …其乘舆,远游冠服,白纱单衣,承以裠襦,乌皮履。拜山陵则服之。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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