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Theses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6, No. 3, pp.93-106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Apr 2016
Received 04 Dec 2015 Revised 20 Jan 2016 Accepted 11 Apr 2016
DOI: https://doi.org/10.7233/jksc.2016.66.3.093

17세기 조선의 복식 사치와 문직물의 수입에 관한 연구

이수현 ; 홍나영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산업학과 교수
A Study on Joseon’s Luxurious Trends of Costumes and Import of Patterned Textiles in the 17th century
Lee, Soo-Hyun ; Hong, Na-Young
Master,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Graduate School
Professor, Dept. of Fashion Industry, Ewha Womans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Hong Na-Young, e-mail: nyhong@ewha.ac.kr

Abstract

The aims of this study are to elucid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uxurious trends of costumes and the importation of Ming’s patterned textiles in the 17th century, and to analyze the similarity between certain Joseon and Ming fabric patterns. After Imjinwaeran[임진왜란] and Byungjahoran[병자호란], more diverse Joseon textile patterns appeared. Generally, wars lead to a shortage of luxury goods and basic commodities. However, 17th century Joseon had an abundance of luxury goods, which allowed even some commoners to have clothing made of Chinese silk. That was the result of free trade between the Koreans and the Chinese merchants in Joseon. Ming’s merchants followed the Ming’s troops into the Korean Peninsula and targeted Koreans to sell their goods, such as fur coats and fur hats. Free trade between Ming and Joseon took place at Junggang [중강] and Donggangjin [동강진]. Joseon imported Chinese textiles there and resold them to Japanese merchants. Some of the Changgi Chung’s excavated fabrics might be an evidence of the import from the Ming. These fabrics had the inscription and were similar to Ming fabrics. It can be assumed that trade occurred between Joseon, China, and Japan, as fabrics found in the countries had similar patterns such as flower, bee, and four seasons, which represented longevity. Furthermore, Chinese fabrics might have triggered Joseon’s weaving skills to develop, which led to the ability to weave refined and beautiful brocade satin at Sangbang [상방]. According to Uigwe[의궤], Sangbang could weave silk fabrics in the 1620s and 1630s. The improvement of weaving techniques might make it possible to weave some popular patterns at Sangbang.

Keywords:

17th Century, Costumes, Import of Patterned Textiles, Joseon, Luxurious Trends, Trades

키워드:

17세기, 복식, 문직물의 수입, 조선, 사치 풍조, 무역

Ⅰ. 서론

일반적으로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17세기 전반의 양난은 정치ㆍ경제ㆍ문화 등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전란과 대기근 등의 어려움과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더불어 대외적으로도 중국은 명과 청의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고 일본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출토복식은 유문직물의 수량 면에서 임진왜란 이전보다 감소하였지만(Yim & Cho, 2004),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정치ㆍ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던 조선에서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반부터 복식의 사치를 우려하고 있었던 정황과 맞물려 있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된 문직물을 비롯한 견직물이 복식 사치를 조장하고 있었으며, 수입 견직물과 초피(貂皮)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확대되고 있었다. 신분에 의한 복식규정이 무력화되면서 사대부를 비롯한 일부 부유한 중인과 서인(庶人)들이 화려한 직물의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신분제의 붕괴를 우려한 조선에서 복식금제(服飾禁制)를 실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7세기 복식 사치에 관한 선행연구는 사회적인 배경을 고찰하거나M. Lee, 2004, 복식금제(Park, 2006; Park & Koh, 2008; Lee, 2003)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 있다. 또한 17세기 직물에 관하여 16・17세기 출토복식을 중심으로 직물과 문양을 분석하거나(Yim & Cho, 2004), 17세기 능직물의 유행을 살펴본 연구(Cho & Lee, 2013), 그리고 상례기록을 통해 17세기 여자 복식을 고찰한 연구(Song, 2009) 등이 있다.

그러나 17세기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복식 사치가 이루어진 배경에 관한 설명은 부족한 감이 있다. 신분제의 해이와 상공업 발달 등이 복식 사치가 성행한 배경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17세기 초에 중국 견직물을 빈번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감이 있다. 전쟁 기간 동안의 중국 견직물의 수입, 그리고 명ㆍ청 교체기에 나타난 사치현상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세기 후반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의 명과 청의 왕조 교체는 요동(遼東)을 통한 무역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 사치가 발생할 정도로 중국문직물을 포함한 견직물이 수입되었다. 이미 중개무역을 통해 중국 직물이 수입되었음은 사학계에서 연구한 바 있다. 한중무역에서 17세기 수입정책을 고찰한 연구(H. Lee, 2004), 17세기 전반의 한중관계를 고찰한 연구(Han, 1999) 등을 통해 17세기 전반 중국의 문직물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이 수입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전란(戰亂)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서 복식 사치가 이루어진 한 원인인 중국 문직물의 수입에 관하여 복식사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17세기 전반 복식 사치의 발생과 문직물 수입과 관련지어 문헌과 출토복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양난을 기점으로 출토직물의 문양이 다양해지고 복식에서의 사치현상을 초래한 배경을 중국과의 교역 방식의 변화라는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문직물의 수입과 더불어 조선의 직조업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교역으로 중국, 일본,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선호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후 삼국에서 이러한 문양들의 변화를 통하여 조선에 수용된 문양이 향후 조선의 미의식과 복식관이 가미된 변화양상을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문헌에서는 중국과의 교역 및 하사관련 내용까지 모두 살펴보고, 생존시기가 17세기인 분묘들 중 다양한 문직물을 사용한 출토복식의 문양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중국에서 수입된 직물은 문헌에서는 유문 및 무문직물 모두 나타나고 있지만, 특별한 기록이 없는 한 수입 여부를 확인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문직물 문양의 조형 및 구도 등의 유사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련성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출토직물은 분묘의 연대가 확실한 17세기 무관들이 당상관 이상의 관품들 지닌 인물과의 관련성을 지닌 분묘의 문양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중국의 직물은 중국과 일본 박물관 등의 도록과 단행본을 중심으로 17세기 이후로 추정되는 문양들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연구방법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편년체 사서와 17세기 전반에 편찬된 의궤(儀軌) 등의 문헌에서 중국 직물의 수입과 중국 직물의 명칭을 찾았다. 그리고 박물관의 도록과 직물 문양 서적 및 출토유물의 보고서, 단행본 등을 참고하여 중국의 직물 문양과 조선의 17세기 출토유물의 문양을 비교하여 유사성을 분석하였다.


Ⅱ. 17세기 조선의 정치ㆍ경제적 상황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건국 이후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던 조선의 모든 상황을 반전시킨 대사건이었다. 전쟁은 국토를 황폐화시켰을 뿐 아니라 왕조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의 참화(慘禍)를 초래하였다. 선조의 요청으로 명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되면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7년 간의 전쟁은 1599년 왜군이 철수하고, 1601년 명군이 철군(撤軍)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명이 조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동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였다. 본격적인 명과 청의 전쟁에 앞서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1619년 심하(深河)에서 명군을 제압하였다(Han, 2004). 그리고 1621년에 후금이 요동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명과 청의 본격적인 왕조교체가 시작되었다. 당시 명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은 요동의 잔존세력을 이끌고 조선의 가도(椵島)로 들어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다. 명은 그를 동강진의 도독으로 삼아 요동 회복을 위해 조선과 후금의 연합을 막고자 하였다(Han, 2004; Jeong, 2012).

한편 조선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하였고, 인조는 동강진에 식량을 지원하는 등(Lee, 2014) 모문룡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명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후금에게 위협이 되었다. 대청(大淸)의 황제로 옹립된 홍타이지는 배후의 위협세력을 해소하기 위해(Han, 2010),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이어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에게 명과 국교를 단절하고 청과 사대관계를 맺은 후 동강진을 정벌하였다. 청은 1644년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북경에 입성하면서 중원의 새로운 패권자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조선은 두 번의 전란과 대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임진왜란 초반의 고난은 명의 원조와 중강(中江)에 설치된 개시(開市)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財用)편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 면포(綿布) 1필로 피곡(皮穀) 1말(斗)을 구할 수 있었던 반면, 요동에서는 쌀 20여말을 구입할 수 있었다. 중강개시에서는 조선과 명, 일본의 상인들 사이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파병된 명군(明軍)의 군량(軍糧)을 공급하기 위해 명의 상인(商人)들이 조선에 입국하였다(Han, 2009). 특히 중국의 산서상인(山西商人)들은 조선인들에게도 청포(靑布)와 비단 등을 팔기 시작하였다(Go, 2013). 명군이 아직 철수하지 않은 선조 33년(1600) 중국 상인들은 경외(京外)에 두루 펴져있었고, 명군이 철군한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요동(遼東)과 동래(東萊)를 오가며 무역을 지속하였다(Han, 1999).

임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고 동래에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대마도 상인들에게만 교역을 허락하였다. 광해군은 1610년 부산 관시(官市)를 통해 삼(蔘), 면주(綿紬), 호피(虎皮), 표피(豹皮), 망룡단자(蟒龍段子)를 제외한 명의 견직물 등을 수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차익(差益)이 많이 생기는 동래 무역은 조선 상인에게 호기(好機)로 작용하였다. 광해군 4년(1612) 5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잠상(潛商)들이 공공연히 수레에 금, 비단, 명주 등을 가득 싣고 동래를 왕래하며 매매를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상인들은 명의 물품을 중강에서 수입하여 동래의 대마도 상인에게 되팔았다. 또한 일본 상인들에게 왜은(倭銀)과 호초(胡椒) 등을 구입하여 명과의 무역에 재투자하는 중개무역(仲介貿易)을 하였다(H. Lee, 2004).

그러나 요동을 후금이 장악하면서 중강개시가 폐지되었다. 조선은 사행무역(使行貿易)을 통해서 명의 물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14년(1622)에 모문룡이 동강진(東江鎭)에 개시를 열었다. 동강진의 군량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열린 개시에 산동(山東)과 절강(浙江) 등에서 상선(商船)이 몰려들었다(H. Lee, 2004; Seungjeongwon-ilgi, 1632). 해상교통의 요지였던 동강진은 조선과 명 사이의 중요한 외교 통로이자 새로운 국제 교역의 장이 되었다. 조선은 동강진에서 직물과 약재, 그리고 은 등을 수입하였다(H. Lee, 2004). 다양한 물품들 중 직물, 특히 비단과 청포(靑布), 그리고 백사(白絲)는 조선의 주된 수입품이었다(H. Lee, 2004). 이 물품들은 조선에서 소비되거나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주로 일본에 백사를 수출하였다. 현종 11년(1670) 3월 3일 기사에서 일본은 백사를 직조(織造)뿐 아니라 밧줄을 만들 때도 사용하여 조선이 남경(南京)에서 수입한 백사는 거의 일본에서 수입한다고 하였다. 후금에서도 직물을 비롯한 명의 물품을 조선을 통해 구입하였다. 적대관계에 있었던 명과 교역할 수 없었기에 청은 조선에 막대한 세폐(歲幣)를 요구하였다.

17세기 전반 중원의 왕조 교체와 전란이 동시에 발생하여 조선의 경제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중강개시와 동강진개시가 설치되면서 조선은 점차 안정되었다. 경제적인 안정은 명과 일본,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중개무역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중개무역은 청이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하면서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Ⅲ. 17세기 조선의 복식 사치와 문직물의 수입

임진왜란 초반 조선은 수입 문직물은 말할 것 없이 국내산 직물도 구하기 힘들었다. 선조 32년(1599) 1월 11일자 기사에 의하면, 사대부들이 방직(紡織)과 직조(織造)를 전폐(專廢)하여 교직(交織)이나 목면, 저포 등을 준비하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당시 관리였던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은 『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의주로 파천(播遷)했을 때 관리들이 갓과 철릭, 승혜(繩鞋)를 신고 관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전 계층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보급 받으면서 차츰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갑진만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초에는 현청색(玄靑色)의 삼승포(三升布)로 만든 철릭이 상품복(上品服)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물자 보급 이후 명의 색주(色紬)로 철릭을 만들어 입게 되었고 비단도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임란초 상품(上品)이었던 삼승포는 점차 아전들이 사용하는 직물이 되었다(Yoon, 1604). 또한 『의인왕후빈전도감의궤(懿仁王后殯殿都監儀軌)』에 따르면, 여전히 국내산 직물을 구하기 어려워서 서울에 있던 명의 상인에게서 단(段)과 견(絹)을 구하여 사용하였다1)고 하였다. 의인왕후의 염습(殮襲)에 사용된 직물 중 노주주(潞洲紬)나 모단(帽段), 팽단(彭緞), 창주견(漳洲絹), 중국 쌍림지방의 견직물인 쌍사견(雙絲絹) 등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칭들이 보인다. 이러한 직물명은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염습 직물에도 보인다(Song, 2009).

중국에서 유입된 직물은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전후(戰後) 복식에서 사치(奢侈)를 초래하였다. 복식의 사치는 임진왜란 종결 후 의관제도(衣冠制度)를 회복하면서 논의되었다. 선조 34년(1601)에 이헌국(李憲國, 1525-1602)은 “당상(唐商)들이 성에 가득하여 아청(鴉靑)이나 비단을 무역하기가 아주 쉬워서 이런 물건으로 단령(團領)을 만들어 당상관(堂上官)ㆍ당하관(堂下官)이 함께 사견을 착용2)”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까지도 국내산 직물을 구하기 어려워 관리들은 요동에서 수입한 견직물로 관복을 만들어 입었다. 물자가 부족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치가 명의 상인들과 중강개시를 통해 물자가 유입되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복식 사치는 광해군대에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광해군 4년(1612)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상관(堂上官)들은 평상복에 능단(綾段)을 사용하였고, 당하관은 비단 속과 생초(生綃)로 지은 답호를 입기도 하였다. 검소함을 추구해야 할 유생들마저 당상관의 연복(燕服)에 해당하는 초록색 주의를 공공연히 착용할 정도였다(Yoon, 2014). 게다가 비단 뿐만 아니라 고가의 수입물품인 초피(貂皮)도 유행하였다. 고가의 수입 견직물과 모피로 복식을 꾸미는 일이 문제가 될 정도로 사치현상이 고조되고 있었다.

문직물 등 고급 직물만을 사용하던 왕실의 사치도 심각하였다. 북경 사행(使行)이나 역관을 통해 명의 물품을 사들이는 궐내무역(闕內貿易)이 성행하였다. 왕실의 사치와 궐내무역은 종친과 권문세가에까지 영향을 주어 사치와 사리(私利) 추구 현상이 극심해졌다. 특히 왕실의 혼례가 있으면 궐내무역이 더욱 극심해졌다.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 대에는 왕자와 옹주의 혼례에 과도한 양의 비단과 규옥(圭玉) 등을 무역하기도 하였다(The Annals of King Seonjo, 1603; The Annals of Lord Gwanghae, 1609; The Annals of King Injo, 1631). 명에서 사여되는 직물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에는 신하들에게 품급에 따라 나누어 주어(The Annals of Kin Injo, 1625)3), 직물의 품질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17세기 전반기를 거쳐 지속되었던 사치현상은 정치・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은 원래 사라능단(紗羅綾緞) 등의 중국 비단을 사행무역(使行貿易)을 통해 수입하였다. 명 중심의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 하에서는 무역에 참가하는 상인과 물품들, 그리고 무역 거래 장소, 물품과 수량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조선에 수입되는 견직물(絹織物)의 양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여 16세기에는 사행무역과 관련된 사상들에 의한 밀무역을 통해 문직물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행무역 외에도 명의 상인(商人)들이 조선에서 거래를 하였으며, 중강개시와 동강진개시가 설치되었다. 명 상인들은 직접 조선인들에게 명의 견직물을 판매하였다. 이들은 종로 등에 난전(亂廛)을 열고 조선인이 좋아하는 청포(靑布)와 털모자, 그리고 양구(羊裘)라 불리는 털외투를 팔았다(Han, 2000). 중강개시가 개설되면서 사무역(私貿易)을 통해 수입하였던 명의 비단을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국경이 개방되어 조선과 명 상인들이 무역을 하게 되자 수입 견직물은 국산 직물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수입 비단을 소비하는 계층이 일부 서민들까지로 확대되면서 수입량이 더욱 증가하였다(H. Lee, 2004). 동래와 중강에 명상(明商)과 대마도 상인들의 모습이 빈번하게 목격되기도 하였다. 왜인들도 요동에 나타나 금백주증(金帛紬繒) 등을 구매하고, 의주의 만상(灣商)들은 중원의 여진인들과 교역을 하였다(H. Lee, 2004).

광해군대에 중강개시가 폐지된 후 문직물의 합법적인 수입은 사행무역이 유일하였다. 더욱이 요동이 후금에 점령된 후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한 사행으로 변경되어 그 위험성은 더욱 배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에 참가하고자 뇌물을 주는 관행이 존재할(Cho, 2011) 정도로 사행무역은 많은 이익을 보장했다. 1622년부터 동강진개시가 이루어지면서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산동(山東)을 비롯한 중국 상선들이 가도(椵島)로 몰려들면서 중국 직물을 구하기가 쉬워졌다.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였던 직물로는 화사주(花絲紬), 청남포(靑藍布), 모단(帽緞), 사단(絲緞), 백사(白絲) 등 다양하였다(H. Lee, 2004). 이런 직물들은 제도 정비를 위해 주변 국가에 하사할 망룡단(蟒龍緞) 및 채단과 청포가 꼭 필요하였던 청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Han, 2009). 즉, 국가를 설립한 청은 복속된 주변민족들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망룡단이나 백사, 청포 등의 직물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명과 전쟁을 벌이던 청은 조선에 이것들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 조선은 면주와 청포 600필, 호피와 표피 12장, 종이 80권, 화문석 15조, 장・단검 10병, 말 2필과 안구(鞍具) 2부, 단목 100근, 호초(胡椒) 8두 정도를 세폐(歲幣)로 보냈다(Han, 2009). 후금은 가혹하리만치 막대한 세폐와 방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중강과 회령, 그리고 경원에 개시를 설치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강진을 통해 모문룡(毛文龍)은 강남과 산동, 요동과 조선을 대상으로 밀무역(密貿易)을 벌였다. 해상무역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이익이 많았다(Jo, 2011). 모문룡은 조선의 인삼과 명의 비단과 직물, 후금의 모피 등을 무역하였다(Han, 2010). 그는 인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조 1년(1623) 망의(蟒衣)와 옥대(玉帶)를 보내었고, 가도에서 교역했던 단(段) 등을 보내거나 대홍팽단(大紅彭段), 관패팽단(官牌彭段), 백추기사(白酋綺紗), 용보(龍補), 능말(綾襪) 등을 예물로 보내기도 하였다(Han, 2010).

조선에서도 상인들과 인근 지역의 조선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인조 때 이계(李烓, 1603-1642)는 밀거래를 하다가 청에 적발되기도 하였다(Han, 2010). 밀거래는 조선 정부도 통사(通事)들을 통해 하였다. 후금에 보내야 할 세폐(歲幣)를 명에서 무역하여 후금에 보내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6년(1629) 5월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명에서 수출을 엄금하는 각색 유문대단(有紋大緞)을 무역해서 적대관계의 후금에게 수출한 사실을 후일 명에서 알게 되면 곤란해질 것이라 하였다. 육로로 명에서 비단을 수입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동강진개시는 조선의 사라능단(紗羅綾緞)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켜 주었다.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군이 동강진을 함락시키기 전까지 이곳은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 상인들의 핵심 상업 거점으로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고 있었다(Han, 2009).

17세기 후반 청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직조국(織造局)을 중건하여 견직물 산업 진흥(振興)에 힘썼다. 특히 오매단(五枚緞)보다 광택이 뛰어난 팔매단(八枚緞)이 나오면서 조선에서도 수입하였다. 조선에서는 재력(財力)만 있으면 신분과 상관없이 문단(紋緞) 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귀천의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식규정의 해이는 점점 심해졌고, 상방(上房)의 무역 물품 중에도 금지된 물품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청이 해금정책을 폐지한 17세기 후반까지 조선의 동래왜관에서 사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대마도 상인과 조선 사상들 사이에서 밀무역이 횡행하였다. 일본으로 구매한 청의 능단(綾緞)과 능라(綾羅) 등 사치품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18세기에도 사치현상은 줄어들지 않았다.

복식의 사치는 부분적으로 직조의 정세함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선조 36년(1603)까지는 조선에서 비단을 직조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년 6월 14일 일본은 무문대전통필단(無文大傳通匹段)과 무금선대홍필단(無金線大紅匹段)의 무역을 요청하면서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으니 준비하여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4). 인조 26년(1648) 7월 11일자 기사에서는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 주도하여 상의원의 직공(織工)을 북경에 보내 직조를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 직조한 금단(錦段)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되었다고 하였다5). 이같은 직조기술의 향상 이전에 이미 1620년대와 30년대에는 조선에서도 견직물의 직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627년에 거행된 소현세자의 가례(嘉禮)시 세자빈의 의대(衣襨) 중 치마의 자적스란(紫的膝欄)과 말군(袜裙)에 소용된 백필단스란(白匹段膝欄)을 도감(都監)에서 직조하도록 한 기록이 있었다(Garyedogam Uigwe, 1627). 또한 1632년에 간행된 『인목왕후빈전도감의궤(仁穆王后殯殿都監儀軌)』에는 남향직겹치마[藍鄕織裌赤亇], 남향직단상상(藍鄕織段上裳), 그리고 심초록향직(深草綠鄕織)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Song, 2009). ‘향직(鄕織)’이라는 명칭이 직물의 일종이거나 토산(土産)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인목왕후의 염습에 사용된 직물명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Song(2009)에 의하면 1637년의 광산부부인 노씨의 장례일기에서도 ‘향직’과 관련된 직물명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인조 22년(1644)의 『승정원일기』에는 곤룡포를 만드는데 사용할 대홍운문대단(大紅雲紋大緞)을 상의원에서 직조하도록 할 것을 비변사에서 청하고 있다. 당시 비변사는 상의원의 뛰어난 직조기술을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18세기까지 직금방(織錦房)에서 직금(織錦)과 금(錦)을 제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Jang, 1999). 숙종 21년(1695)에는 상의원에서 직조한 공주(貢紬)가 너무 가늘고 아름다워 품질을 낮추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Jang, 1999). 이처럼 사치풍조는 고품질의 견직물을 소비하려는 욕구를 자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중국에서 수입된 문직물이 조선의 직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의원에서 금단 직조기술의 향상에는 부분적으로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Ⅳ. 명과 조선 직물에 나타난 문양 비교를 통한 문직물의 수입

조선 전기의 출토직물에 나타난 문양은 정형화된 형태의 세화문(細花紋)과 연화만초문(蓮花蔓草紋), 그리고 운문(雲紋)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기의 출토직물이 많이 발굴되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17세기 출토직물의 문양은 이전에 비하여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출토직물이 많이 발굴되었고 상장례(喪葬禮)가 예법에 맞게 시행된(Yim & Cho, 2004) 것이 그 한 원인일 것이다. 또한 명・청 교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간의 자유로운 교역을 통해 문직물이 수입된 것도 한 원인이라 생각된다. 상인들에 의한 교역과 명의 직조국(織造局)이 폐쇄된 후 민간 수공업자에 의한 직조로 다양한 문양의 직물이 나타났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1628년 이후 명의 직염국(織染局)에서 직물 제직은 중단되었고 1645년 이후에야 직조국(織造局)이 중건되었다(Bao & Xu, 2004). 따라서 17세기에 조선에 수입된 직물은 민간 수공업자가 직조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7세기의 분묘에서 출토된 직물의 문양은 이전과 상당히 다르다. 화훼문(花卉紋)과 과실문(果實紋)을 비롯하여 기하문(幾何紋), 곤충 및 조문(鳥紋) 등 길짐승을 제외한 다양한 소재들이 직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문양의 소재와 더불어 문양을 표현하는 구도와 구성방식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측면이 보인다. 또 무관(武官)들의 출토직물에서 문직물이 많이 보이고 있다. 신경유(申景裕, 1581-1633)를 비롯하여 이응해(李應懈, 1547-1626), 최원립(崔元立, 1618-1690), 김여온(金汝溫, 1596-1665), 남오성(南五星, 1643-1712) 등의 분묘에서 출토된 직물들이 대표적이다. 무관들의 복식에서 문직물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전란을 겪으면서 무관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인조반정과 북벌(北伐)을 지향하였던 시기였고, 신경진(申景禛, 1575-1643)처럼 사신(使臣)으로 무관들이 사행을 갔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17세기 무관들과 당상관 이상의 관료들의 분묘에서 출토된 직물은 중국과의 관련성을 더욱 잘 보여줄 것이라 생각된다.

17세기 전반의 조선은 여러 국적의 상인들이 모였다. 따라서 이 시기 직물문양은 다양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으며,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상당히 유사한 직물들이 동아시아 3국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문양에서도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는 더욱 다채로운 문양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Fig. 1>은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남양 홍씨(1584-1654)의 겹저고리에 나타난 운문(雲紋)이다. 조선시대를 풍미한 사합여의운문(四合如意雲紋)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Fig. 2>의 명대 운문과 매우 유사한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굵은 선과 가는 선이 마치 특경(特磬)이나 마름모 형태처럼 연결되어 있고 능직(綾織)으로 직조되어 있다. 이는 17세기에 실용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능(綾)직물이 출토직물에서 많이 나타나는(Cho & Lee, 2013) 현상이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운문과 운보문(雲寶紋)은 조선시대 관복에 사용되었고 영조 때 문단의 수입 및 직조를 금지할 때에도 계속 제직되어졌던 문양이었다. 사합여의운문은 조선의 전시기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에는 구름 꼬리가 연결된 사합여의운문으로 정형화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운문이 나타나고 있다.

<Fig. 1>

Cloud Pattern (Dankook University Suk-jooseon Memorial Museum [DUSMM] (ed), 2002, p. 14)

<Fig. 2>

Cloud Pattern (39B)(Sachon byungbu (ed), 1973b)

17세기 전반기에 보이는 다양한 소재 중 화훼와 동물, 특히 화조문이 많이 보이고 있다. 먼저 <Fig. 3>에서 보이는 신득연(申得淵, 1585-1647)가의 여성분묘에서 출토된 문양처럼 월계(月季)와 목련이 이시기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보문(寶紋) 중 특경(特磬)과 같이 흔히 시문되지 않는 보배문이 나타나고 있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일본의 화조문인 <Fig. 4>의 사양화문은 명의 직물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사양화문의 직물과 만자(卍字), 능형문(菱形紋) 등을 바탕문양으로 하고 사양화(四樣花)를 시문한 문양들이 기모노 직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금상첨화(錦上添花)’ 구도를 사용한 사양화문은 김여온의 소창의 겉감 등 여러 출토직물에 사용되었다. 특히 <Fig. 3>과 <Fig. 4>처럼 사양화와 새 또는 벌과 벌집을 보문과 함께 복합적으로 문양을 구성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Fig. 4>의 직물이 명에서 직접 수입되었는지 아니면 조선을 통해 수입되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에서도 유사한 문양의 직물이 많이 발굴되어 중개무역을 통해 수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양화문은 17세기 이전에는 문양이 작고 꽃의 형태를 명료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7세기에는 꽃이 다양해지고 품종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꽃의 크기가 커진 것을 알 수 있다(Song, 2011). 사계절을 상징하는 계절 꽃들과 주변의 자연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새나 벌 등으로 화조화(花鳥畵)와 같은 느낌을 부여하는 것 역시 이 시기화문의 주요 특징이다(Song, 2011).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직물 문양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은 당시 사물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추정된다(Cho, 2008).

<Fig. 3>

Flower, Bee and Beehive Pattern(Daegu National Museum [DNM] (ed), 2011, p. 32)

<Fig. 4>

Flower, Bee and Beehive Pattern (18)(Tokyo National Museum [TNM] (ed))

사양화문은 절지형(折枝形)의 화문으로도 시문되어 나타났다. <Fig. 5>의 정광경(鄭廣敬, 1586-1644)의 배위 여흥 민씨(1586-1656)의 이불에 시문되어있는 사계화조문은 연꽃, 국화, 매화와 모란, 그리고 두 마리의 새가 부리에 경(磬)을 물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이 문양은 ‘사계경축문(四季慶祝紋)’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Zhao, 1999). <Fig. 6>의 화조문은 항주(杭州)의 사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Fig. 5>와 거의 동일한 직물처럼 보인다. 이 문양은 꽃의 구성이나 새의 배치 등에서 조금씩 다른 조형성을 보이는 다양한 구성을 보이는데, 이응해와 장기정씨(1565-1614), 양천 허씨(1566-1626) 등의 직물에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한 폭의 화조화와 같은 사생풍 구도의 직물 문양은 조선과 명, 그리고 일본 모두에서 사랑받았던 문양으로 여겨진다.

<Fig 5>

Flowers of four seasons and Bird Pattern (Gyeonggi Provincial Museum [GPM] (ed), 2004, p. 127)

<Fig. 6>

Flowers of four seasons celebrating longevity(Zhao, 1999, p. 233)

또 다른 형태의 사양화문으로 여흥 민씨의 출토직물에 시문된 <Fig. 7>이 있다. 사양화문이 넝쿨로 연결된 형태는 17세기에 처음 등장하는데(Song, 2011), 명의 만력제(萬曆帝) 능인 정릉(定陵)에서 출토된 <Fig. 6>의 사양화문과 흡사하다. 이외에도 명대 불경의 표장직물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넝쿨형 사양화문이 많이 나타나 이 시기 명에서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Zhao, 2012). 특히 17세기 사양화문에서는 꽃의 구성이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Song, 2011).

<Fig. 7>

Flowers representing four seasons and vine patterns(Cho, 2006. p. 105)

<Fig. 8>

Pattern of winding flowers woven in gold threads(Beijing Shi(ed). 2006, p. 424)

앞서 본 화조문 외에 기하문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만자(卍字)문의 문자문(文字紋), 산형(山形)의 기하문과 마름모 형태의 능문(菱文), 태극문(太極紋) 등도 출토직물에 많이 보이고 있다. 실제로 신경유와 김여온, 최원립 등의 출토직물에서 상당한 기하문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화문이나 운문에서 보조 문양으로 사용되던 보배문이 이 시기 단독으로 시문된 경우도 보인다. <Fig. 9>는 김확(1572-1633)과 동래 정씨(1567-1631)의 합장묘에서 발견되었는데, 전보(錢寶), 쌍서각(雙犀角), 화주(火珠), 산호(珊瑚), 여의(如意), 보(黼) 등이 시문되어 있다. <Fig. 9>의 잡보문(雜寶紋)은 정릉에서 출토된 <Fig. 10>과 유사한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개별적인 보문 안에 장식적인 능문(菱文)과 같은 기하문을 배치하였다. 잡보문의 배열이나 개별 문양 속의 기하문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지만, 이중으로 장식한 측면에서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중국에서 직물이 수입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존재한다. 포항에서 출토된 기자헌(奇自獻1562-1624)의 부실(副室)인 장기정씨(長鬐鄭氏, 1565-1614)의 유물 중에 구입한 경로를 알 수는 없지만, 명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무문단과 치마가 있다. <Fig. 11>은 장기 정씨의 치마 중 안쪽 하단부분에 “중의정직(重義定織)”이라는 정사각형 도장이, 그 밑에는“삼장일관, 이면여일(三丈一官裏面如一)”이라는 문자가 붉은색으로 찍혀 있다. Cho(2000)는 “중의정직”이 직물의 등급을 의미하고, “삼장일관”은 직물의 검수관(劍水館)을, 그리고 “이면여일”은 균일한 제직상태로 합격을 의미하는 도장이라고 추정하였다. 명대에는 정릉에서 출토된 직물처럼 직물에 제직자(製織者)와 직조한 연월과 지역, 검사관의 이름 등 상세한 내용을 기록해 놓기도 하고, 지방 직염국에서 공납(貢納)한 직물인 경우 직물 뒷면에 도장을 찍어 품질을 증명하고 있다(Cho, 2000). 민영수공업체제라 할 수 있는 반장은제도(班匠銀制度)6)로 변경된 시기가 1562년으로 조선에 수출되었던 직물이 남경(南京)이나 소주(蘇州) 및 항주(杭州)에서 직조된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장기 정씨의 출토직물 중에는 피륙 상태 그대로 출토된 필단(匹段)들도 보인다. <Fig. 12>의 무문단에는 “월산자가, 본기진정, 청수견단, 불오주고(越山自家本機眞正淸水絹段不悟主顧)”가 붉은색으로 찍혀 있다. Cho(2000)는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지방이 과거 오월(吳越)로, 견직으로 유명한 지역이라 이곳의 소산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명확한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장기 정씨가 사망한 동년 기자헌이 영의정에 올랐던 정황상 중국에서 수입된 직물을 하사받았거나 당시까지 조선에서 활약하였던 중국 상인들을 통해 구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Fig. 9>

Treasures Pattern(GPM (ed), 2004, p. 268)

<Fig. 10>

Treasures Pattern(Beijing Shi(ed), 2006, p. 240) & illustration by researcher

<Fig. 11>

Seal of Changgi Chung’s Skirt - Research reports of excavated costumes from Changgi Chung’s grave at Naedanri Pohang(Andong National University Museum[ANUM] (ed), 2000, p. 95)

<Fig. 12>

Seal of Changgi Chung’s Satin - Research reports of excavated costumes from Changgi Chung’s grave at Naedanri Pohang(ANUM (ed), 2000, p. 95)

17세기 전반에 나타난 직물의 문양을 살펴보았을 때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문양들이 보이고 있다. 화조문과 화봉문(花蜂紋) 등은 화조화의 느낌이 나는 사생풍의 구도를 보이고 있고 김여온 묘에서 출토된 만자문처럼 단순한 문자문과 만자문이나 공(工)자문, 창살문 등을 바탕문양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화문이나 운문 등을 시문한 문양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 사람의 분묘에서 출토된 직물 문양도 매우 다양하여, 이 시기 다양한 미의식을 지닌 직물 문양의 다양성이 가장 큰 특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Fig. 3>, <Fig. 4>, <Fig. 5>, <Fig. 6>처럼 유사한 느낌을 부여하는 문양의 직물들이 조선과 중국,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유하였던 미의식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금상첨화(錦上添花)’와 같은 구도는 이 시기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양구도로, 조선과 일본에서 이러한 문양을 수용하여 직접 직조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경우 17ㆍ18세기 직물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어 수입된 문직물의 문양을 우리의 미감을 가미하여 직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Ⅴ. 결론

조선의 17세기는 출토된 직물에서 이전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다양한 문양이 나타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겪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다양한 문직물이 사용된 것은 파병되었던 명의 군대를 따라 입국하였던 명의 상인(商人)들과 중강개시(中江開市) 및 동강진개시를 통해 문직물이 수입되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쟁 직후인 선조와 광해군 때에 복식에서 사치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들을 통해 수입되었던 중국 비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620년대에 명의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한 동강진(東江鎭)의 개시를 통해 조선 뿐 아니라 중국 강남지역의 상선(商船)들까지 조선에 들어와 무역을 벌였다. 명의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조선에서 필요한 직물들, 후금 및 일본과의 무역에 소용될 직물들과 백사, 청포(靑布)와 금단(錦段) 등을 수입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무역은 국가 간의 제한된 공무역이 아닌 개인들이 벌이는 합법적인 사무역으로 보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명의 관영수공업이 무너진 후 민영 수공업자들이 자유롭게 직조할 수 있어서 이전보다 문직물의 소재나 구성, 구도 등이 다채로워졌다. 특히 조선에서 출토된 직물문양과 유사한 직물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보이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유한 유행경향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의 출토직물 중 명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직물이 장기정씨의 유물 중에 있었다. 그리고 화조문(花鳥紋)이나 잡보문(雜寶紋) 등 중국과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직물의 문양과 조선에서 출토된 직물 문양에서 유사성이 보이고 있다. 의궤 등에도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팽단(彭緞)이나 노주주(潞洲紬) 등의 직물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적어도 일부 복식에 사용된 직물은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7세기 조선의 중개무역 과정에서 명의 직물이 조선과 일본으로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명이나 청에서 직접 수출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해금정책(海禁政策)이 해제되기 전까지 조선을 통해 전해진 문직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수입된 직물은 일본과 조선의 직조업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조선에서는 인조 때 중국에 장인을 보내 금(錦)을 직조하는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고, 이후 조선의 금단(錦段)직조가 발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인목왕후빈전도감의궤』에 기록된 ‘향직(鄕織)’이라는 명칭과 의궤에 나타난 도감(都監)이나 상의원에서 직조하도록 한 기록 등을 통해 적어도 1630년대에는 상방의 장인들이 직조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 조선의 직조업이 문직물 수입의 영향으로 발전하였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시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유사한 문양의 직물들이 발견되었고, 유사한 시기의 출토직물에서도 동일하거나 비슷한 소재와 구성의 문양이 보인다. 조선에서 직조업이 발전하면서 문직물을 직접 제직하였다면, 당시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들을 직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명확하게 수입된 문직물과 직조업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중국의 문양이 우리 복식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향후 동아시아 삼국에서 17세기에 공유했던 직물문양이 복식과 미의식의 변화 등으로 어떠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는지 규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석사학위 청구논문의 일부를 보완하여 요약한 것이다.

Notes

1)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1600), 梓宮 土産紬絹難備唐商適到京城故貿用段絹
2) 宣祖實錄 辛丑 6月 8日 變亂之後, 物力蕩竭, 適因唐商滿城, 雅靑及東絹, 貿易甚易, 以此等物爲團領, 而堂上堂下, 同着絲絹
3) 仁祖實錄 癸巳(1625) 6月17日. 臣竊聞往年赴京使臣之行, 譯官等交易之際, 公然稱說於中國曰: “某服飾, 乃我國禁中之所御, 必須十分取精也; 某錦繡, 乃我國禁中之所服, 必須十分取好也”, 爭美妬奇, 不知爲累於國家。
4) 宣祖實錄 癸卯(1603) 6月 14日 叚則非貴國所産, 隨後無妨.
5) 仁祖實錄 戊子(1648) 7月 11日 自點以本院織錦, 不及中國, 遣織工往北京, 學得織造之法。 自是, 錦段華美,上悅之。
6) 반장은제도(班匠銀制度)는 장역제(匠役制)를 행하던 수공업 체계에서 장호(匠戶)의 사적 경영을 인정해주고, 대신 장역(匠役)을 은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락한 제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명에서는 관영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수공업이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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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Cloud Pattern (Dankook University Suk-jooseon Memorial Museum [DUSMM] (ed), 2002, p. 14)

<Fig. 2>

<Fig. 2>
Cloud Pattern (39B)(Sachon byungbu (ed), 1973b)

<Fig. 3>

<Fig. 3>
Flower, Bee and Beehive Pattern(Daegu National Museum [DNM] (ed), 2011, p. 32)

<Fig. 4>

<Fig. 4>
Flower, Bee and Beehive Pattern (18)(Tokyo National Museum [TNM] (ed))

<Fig 5>

<Fig 5>
Flowers of four seasons and Bird Pattern (Gyeonggi Provincial Museum [GPM] (ed), 2004, p. 127)

<Fig. 6>

<Fig. 6>
Flowers of four seasons celebrating longevity(Zhao, 1999, p. 233)

<Fig. 7>

<Fig. 7>
Flowers representing four seasons and vine patterns(Cho, 2006. p. 105)

<Fig. 8>

<Fig. 8>
Pattern of winding flowers woven in gold threads(Beijing Shi(ed). 2006, p. 424)

<Fig. 9>

<Fig. 9>
Treasures Pattern(GPM (ed), 2004, p. 268)

<Fig. 10>

<Fig. 10>
Treasures Pattern(Beijing Shi(ed), 2006, p. 240) & illustration by researcher

<Fig. 11>

<Fig. 11>
Seal of Changgi Chung’s Skirt - Research reports of excavated costumes from Changgi Chung’s grave at Naedanri Pohang(Andong National University Museum[ANUM] (ed), 2000, p. 95)

<Fig. 12>

<Fig. 12>
Seal of Changgi Chung’s Satin - Research reports of excavated costumes from Changgi Chung’s grave at Naedanri Pohang(ANUM (ed), 2000, p.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