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71, No. 3, pp.111-123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21
Received 07 May 2021 Revised 23 May 2021 Accepted 16 Jun 2021
DOI: https://doi.org/10.7233/jksc.2021.71.3.111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타나는 복식 자료

이경미
한경대학교 의류산업학전공 교수
Clothing Materials in Park Ji-won's "Yeolhailgi"
Kyungmee Lee
Professor, Major of Clothing Industry, Hankyong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Kyungmee Lee, e-mail: evangelline@hanmail.net

Abstract

This study summarizes the clothing materials that appear in Yeonam Park Ji-won's book "Yolhailgi" and examines his view of costumes.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ly, Yeonam briefly describes his observations about Qing Dynasty clothing, followed by a more detailed description of Manchu ornaments such as the Chaozhu (朝珠) and the head of the hat, as well as the foot-binding(纏足) of a Han Chinese woman. In addition, Yeonam mentions that people performing in banquets wore Han Chinese costumes, which were commonly recorded by Joseon's envoys. Secondly, Yeonam regards the transformation of the Qing dynasty as invoking pressure and restraint on the head of men, much like the foot of the Han Chinese woman, to use the expression of a Qing dynasty scholar, Hu Ting(鵠汀). Thirdly, Yeonam introduces some of the costumes worn by Joseon's envoys. Fourthly, he expresses negative opinions about Joseon's Got and concerns about the wide sleeves of Dopo and Cheolik. In particular, he argues that Dopo and Got were ridiculed because they resembled Chinese monks. Fifthly, Yeonam argues that the Qing Dynasty's Socha (繅車) should be introduced to improve weaving technology and that all wool hats imported from China should be produced in Joseon to prevent waste of silver. Sixth, in "Heosaengjeon," Yeonam states that learning about Qing Dynasty culture is essential and that it is necessary to talk with members of this culture, even if there are limits to their practice of cutting the topknot. In other narratives, Yeonam expresses a sense of relief that the Joseon Dynasty maintains hair and clothing. This study further confirms that Yeonam did not deviate from the Joseonjungwhajuwyi (朝鮮中華主義) and only accepted either the advanced technology of the Qing Dynasty or considered plans to reduce costs.

Keywords:

clothing, Joseon dynasty, Park Ji-won, Qing dynasty, Yeolhailgi

키워드:

복식, 조선, 박지원, , 열하일기

Ⅰ. 머리말

복식에 대한 생각 속에는 자신이나 타인, 혹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정체성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특히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기록에 이런 관념이 분명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Lee, 2013).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후기 청나라 사행을 다녀온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은 조선과 청의 복식, 복식에 대한 생각, 복식을 통해 표현된 정체성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연행록에는 조선 사신이 관찰한 청나라 사람들의 복식과 연행간 사절 일행이 입고 있는 복식이 잘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 드러나는 조선인의 복식과 자아 관념에 대한 내용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행록에 기록된 복식자료에 대해 복식학계에서는 2000년 이후 여러 편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선행연구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한 편의 연행록을 소개하면서 그 기록에 보이는 복식 관련 자료들을 소개하고 분석한 연구들이 있다. Chun(2004)은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의 복식관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김창업과 같은 해 파견되었던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燕行錄)』과 김창업 저작과의 비교 연구(Chun, 2005),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 나타난 복식문화 연구(Chun, 2006)를 진행하였다. 이들 연구에서는 연행사절들이 중국에 사행을 다녀오면서 기술한 청나라 복식, 청인들의 조선 복식 평가, 사절단의 조선 복식에 대한 자부심 등 연행록들에 보이는 복식 자료들을 정리하고, 사절단의 생각을 화이론(華夷論)에 기초한 조선중화주의를 기준 이념으로 상정하여 분석하였다. 본 논문의 분석 대상인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Choi(1996)Chun (2009)의 복식사 분야 연구, H. C. Kim(2009)의 의식주 생활에 대한 연구가 있다. Choi(1996)는 『열하일기』에 언급된 복식 용어가 어떤 형태의 복식을 말하는지 사진을 제시하면서 고찰하는 방식으로 연구하였고, Chun(2009)은 학술대회 발표문을 통해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중화사상을 기준으로 했던 조선 지식인들의 사고와는 달리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사물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H. C. Kim(2009)은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삼사(三使)와 연암, 수행원들의 복식을 몇 가지 장면을 통해 정리하였다.

둘째, 여러 편의 연행록에 등장하는 복식 관련 자료들을 함께 비교 고찰한 연구들이 있다. Chun & Kim(2006)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이의현의 『경자연행잡지』, 이압의 『연행기사』, 박지원의 『열하일기』,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에 기록된 100여 년 간의 남자 수식(首飾)에 대한 의식 변화를 살펴보았고, Lee(2009)는 조선시대 17종의 연행록과 25종의 해행록 분석을 통해 복식문화의 정체성 의식에 관해 연구하였다. Yun(2014)은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의 연행록을 포함하여 총 8편의 북학파 연행록에 나타난 조선의 복식을 검토하였다.

셋째, 연행록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술에 연행록을 포함시켜 함께 분석한 연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Jung(1994)은 18세기 후반 북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실학 사상가들의 복식문화를 검토한 연구에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일부 분석하였다.

그 외 Yun(2003)은 조선시대 부경사행(赴京使行)의 사행예절에 보이는 복식을 검토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복식사 분야의 연행록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자료 발굴 단계이다. 1차적으로 여러 연행록에 수록된 복식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고 이 자료들에 등장하는 복식의 형태를 실증하거나 내용을 단편적으로 분석하였다. 복식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연구들은 연행록 저술자들을 실학자로 상정하고 접근하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근래에는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연행록에서 다루고 있는 복식 자료들을 다른 분야 연구자의 관점에서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있는데, 이들은 연행록에 나타난 복식 관련 자료를 의관(衣冠) 담론으로 파악하고 화이관(華夷觀)의 전환 여부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는 Lee(2017)의 연구와 Kim(2019)의 연구가 있다.

한편, 최근 역사학 분야에서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학문으로서의 실학’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역사학 분야의 새로운 관점으로는 실학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문이 아니라 학풍일뿐이었고, 근대에 이르러 조선 후기의 실학개념과 대한제국기의 실학 개념이 접합된 가운데 지식인의 실학의식에 의해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Noh, 2018), 더 이상 성리학을 극복한 근대의 맹아이자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문 사조로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정리하고 있다(Huh, 2006; Noh, 2019).

역사학계의 실학에 대한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규정되어 왔던 학자들의 저작물을 실학적으로 보이는 자료와 실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료로 이중적인 잣대로 분석하였던 것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자료에 표현된 내용을 그 시대의 생각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근래 역사학에서 이루어진 북학을 포함한 실학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 지점에서, 본 연구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이는 복식 자료를 추출하여 정리하고, 그의 복식관(服飾觀)을 다시 고찰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 이 연구는 복식사 연구에서 실학자들의 저술을 성리학과 동떨어진 새로운 학문으로 접근하지 않고 최근 역사학계에서 진행된, 당대의 관점에서 내용을 생각해 보는 인식을 받아들여 『열하일기』에 나타나는 복식과 복식에 대한 연암의 생각을 재검토 한 것이다.

이 글을 위해 먼저, H. C. Kim(2009)의 번역본 『Yeolhailgi [열하일기] 1, 2, 3』에서 복식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다음으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원문의 확인을 통해 복식 용어들을 재확인한 다음, 내용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Ⅱ. 박지원이 본 청나라 복식

1. 청나라 사람들의 복식 묘사

연암은 여행 도중 만난 청인들의 복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되놈들이 구경한다고 떼거리를 지어 책문 안에 늘어섰는데 (중략) 어떤 자는 흑공단의(黑貢緞衣)를, 어떤 자는 수화주의(秀花紬衣)를, 어떤 자는 생포생저(生布生苧) 혹은 삼승포(三升布), 야견사(野繭絲) 윗옷을 입었는데 바지도 같은 옷감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58)1).
말을 탄 사람은 모두 흑단화자(黑緞靴子)를 신었고, 걸어가는 사람은 모두 청포화자(靑布靴子)를 신었는데 신발 바닥에는 모두 베[布]를 열 겹으로 깔았으며, 미투리[麻鞋]나 짚신[藁屨]은 보이지 않았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92).
(신행행렬에서) 몸에는 구조망포(九爪蟒袍)를 임시로 걸쳤는데 금빛 안장을 한 백마에 은등자(은 빛 발걸이)를 지그시 밟고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있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06).
황제는 관(冠)의 정수리가 없이[無頂] 홍사모자(紅絲帽子)를 쓰고 흑의(黑衣)를 입었으며, 금직(織金)의 두터운 보료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253).

첫째, 위의 인용문을 살펴볼 때, 청나라 남자 복식에 대한 관찰은 황제부터 일반인의 복식에 이르기까지 색깔이나 재료에서 조선의 것과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단순하게 관, 상의, 신 등과 같은 일반적 표현일뿐 구체적인 명칭이 나타나는 곳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신행행렬에서 말을 탄 사람이 입은 옷인 구조망포(九爪蟒袍) 정도가 언급되어 있다. 관심있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물건의 이름을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고 그 생긴 모양이나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탐구한 연암의 글쓰기로 볼 때 그는 청나라 복식을 자세히 알려는 생각이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조주(朝珠)를 가리키며 “저건 뭐 하는 물건입니까?” 라고 물으니 여천(麗川)은, “이것은 나라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물품으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외다. 대개 조의(朝衣)를 입으면 목에 염주(念珠)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조주(朝珠)라 부르는데, 비싼 건 값이 천 냥이나 만 냥 하는 것도 있답니다. 각로(閣老)를 지냈던 민중(敏中)은 자(字)가 내재(耐齋)인데 금년 봄에 죽었습니다. 7월에 그의 가산을 몰수하여 관할 관청에서 이를 팔아 처분하였는데 그의 조주(朝珠) 네 개의 값이 은자 삼 만 칠천 냥이었습니다. 값이 너무 비싸 아무도 감히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216).
벼슬아치들이 목에다 거는 구슬목걸이 조주(朝珠)는 반드시 5품관 이상만 하도록 되어 있다. 단 한림(翰林)의 경우는 7품이라도 조주를 거는 것을 허락하지만, 외직으로 나가서 주현(州縣)의 수령이 되면 지닐 수 없다.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나 서종현(徐宗顯) 무리들이 모두 구슬[珠]을 걸고 있는 까닭은 외국 사람에게 으스대려고 임시로 한 것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448).
하나는 모자의 정수리에 수정[晶]을 달았고, 하나는 산호[瑚]를 달았는데 모두 관문을 지키는 참장(參將)이라고 한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116).

둘째, 이상의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옷에 대한 내용에는 그다지 구체적인 명칭을 쓰지 않은데 비해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여천(麗川)에게 조주(朝珠)<Fig. 1>2)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동란섭필(銅蘭涉筆)」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또한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에서는 모자 정수리 장식을 자세히 보고 서술했다. 연암은 만주족의 장신구인 조주와 모자의 특징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Fig. 1>

Chaozou [朝珠] of Qing Dynasty (ECCCEA, 2004, p. 480)

(부인의) 묶은 머리에는 온통 꽃을 꽂았고, 금팔찌[金釧]와 옥귀걸이에 붉은 분[朱粉]까지 얇게 발랐다. 몸에는 흑색장의(黑色長衣)를 걸쳤는데 옷에는 은단추를 빼곡하게 달았고, 발에는 화초와 벌과 나비를 수놓은 신발[靴子]을 신었다. 대개 만주 여성은 발을 작게 하기 위해 피륙으로 발을 감지도 않고 전족을 하는 궁혜(弓鞋)를 신지도 않는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96).
(신행 행렬의 노파들의) 한 마디쯤 위로 치솟은 쪽머리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꽃을 꽂아 늘어뜨렸으며,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고 흑의황상(黑衣黃裳)을 입었다. 또 한 수레에는 젊은 아낙 세 명이 함께 탔는데 붉은색 바지[朱袴]와 녹색 바지[綠袴]를 입고 모두 치마[裳]는 입지 않았는데(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06).
한족 여자는 처음 보았는데, 모두 천으로 발을 감고 전족(纏足)용 궁혜(弓鞋)를 신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37).
태평차(太平車) 한 대에 부인 둘이 탔는데 (중략) 모두 꾀꼬리 빛깔의 녹색 윗옷[鶯哥綠襖]과 주황색 바지[朱黃色袴]를 입고, 옥잠화, 패랭이꽃, 석류 꽃으로 머리 장식을 요란하게 했는데 아마도 한족 여자인 것 같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58).

셋째, 연암이 여행 중 만난 여자들의 복식을 묘사한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 머리에 꽃을 꽂는 장식, 귀걸이 장식,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는 것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복식의 명칭이 없이 의(衣), 고(袴)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또한 만족 여자들은 하지 않는 한족 여자들의 전족(纏足)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새벽 무렵 사신은 반열에 참여하였다가 연희를 관람하였다. (중략) 채색한 적삼[彩衫]과 수놓은 포[袍者]를 입은 자가 얼굴에는 붉은색 분칠[朱粉]을 하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상반신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수레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연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족[漢]의 의관(衣冠)을 차려입었으며(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p. 65-66).

넷째, 연암은 연희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이 한족의 복식을 착용하는 것에 대해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서 위와 같이 언급하였다. 이는 다른 연행록에도 거의 발견되는 기록으로, 스스로 중화(中華)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조선 사절들은 모든 것이 만족의 문화로 뒤바뀐 청나라 땅에서 무대 위에서만 한족 의관이 보존되고 있는 것을 목도할 때 다시 한번 시세를 한탄하거나 분노하는 계기로 삼곤 했다(Ge, 2019).

도사(道士)가 바리때를 치며 돈을 구걸하는데, 머리는 변발[剃髮]을 하지 않고 묶어서 상투[椎髻]처럼 한 것이 우리나라의 우파승(優婆僧) 같았다. 머리에는 등립(藤笠)을 쓰고 몸에는 야견사(野繭絲)로 된 도포(道袍)를 걸쳤는데, 흡사 우리나라 유사(儒士)가 입는 옷과 같으나 흑색의 방령(方領)을 단 것이 약간 차이가 난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p. 126-127).
사당 안에서 도사 한 사람이 달려 나온다. 몸에는 야견사(野繭紗)로 만든 도포(道袍)를 입고 머리에는 등립(藤笠)을 썼으며 발에는 공단(貢緞)으로 만든 흑화(黑靴)를 신고 있다. 그는 입(笠)을 벗고 자기 상투를 만지며 내게 “상공의 상투와 모양이 같습니다.”라고 하였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60).

다섯째,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도사의 복식 묘사를 할 때 조선의 복식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었다. 청나라 도사가 변발을 하지 않고 상투를 튼 것과 도포와 유사한 포(袍)에 등립(藤笠)을 착용한 것으로부터 조선인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2. 청나라 복식에 대한 의견

연암이 청나라 복식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함께 피력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 복식을 대표하는 표현은 마제수가 달린 좁은 소매의 포(袍)이다. 연암은 이와 같은 차림이 현실에서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고 표현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의 의관은 번쩍번쩍 빛나는 신선의 복식, 중화[華]의 복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풍속과 같은 중화의 복식을 연희에서만 착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현하였다.

내가 아침나절에 피서산상 문밖에서 청나라 관원들이 떼지어 조정에서 퇴청하는 것을 보았는데, 빨간 모자[茜帽]에 소매 좁은 마제수[蹄袖]가 보는 사람을 매우 부끄럽게 만든다. 그에 비해서 우리 사신들의 의관(衣冠)은 중화[華]라고 할 수 있으니 가히 선인(仙人)과 같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거리의 청국 아이들은 사신들의 의관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도리어 연희 마당 광대들의 의복이라고 말하니, 참으로 안타깝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137).
막 연희를 마친 배우들은 망포(蟒袍)를 입고 상홀(象笏)을 쥐었으며, 피립(皮笠), 종립(椶笠), 사립(絲笠), 사모(紗帽), 복두(幞頭) 등을 쓴 모습이 완연히 우리나라의 풍속과 같고, 도포(道袍)는 혹 자주색도 있는데 방령(方領)에 검은 연(緣)를 두른 것 등은 아마도 옛 당나라 때의 제도인 것 같다. 슬프다! 중원이 오랑캐 손에 함락된 지 백여 년이 지났지만, 의관의 제도(衣冠之制)는 오히려 광대들의 연극에나 비슷한 것이 남았으니,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또 연희하는 무대에는 모두 ‘이와 같은 것을 보라’는 뜻의 여시관(如是觀)이라는 세 글자를 써 붙였으니, 이것에도 은밀한 뜻을 부쳤음을 볼 수 있겠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325).
8월 13일은 바로 황제의 탄신일인 만수절(萬壽節)로, 이날을 전후로 사흘동안 연희가 베풀어진다. 모든 관리들은 오경(五更)에 대궐에 이르러 황제에게 문안드리고, 묘시 정각에 반열에 참여하여 연희를 구경하고 미시 정각에 마치고 퇴궐한다. (중략) 매 대본을 하나 연희할 때마다 동원되는 배우들은 무려 수 백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錦繡之衣]을 입었다. 대본에 따라서 옷[衣]을 바꾸어 입으며, 모두 한인 관리의 포(袍)를 입고 모자[帽]를 썼다. (중략) 황제, 요임금, 순임금 시대의 고대로부터 그 의관(衣冠)을 그대로 본뜨지 않은 것이 없고, 제목에 따라 그것을 연희하였다. (중략) 그렇게 본다면 지금 연희하는 연극은 바로 오랑캐에 대한 연극인가?(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506).

둘째, 연암은 청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변발한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고 있다. 「동란섭필(銅蘭涉筆)」에서 연암은 명나라 말기에 머리를 삭발했던 이탁오(李卓吾)의 조짐으로부터 시작된 변발이 청대에 익숙해져서 훗날에는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명나라 말기의 이탁오(李卓吾)는 머리가 가렵고 손질하기 번거로운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드러내 놓고 머리를 삭발하였다. 중국인들은 그것이 흉측한 그의 성질 탓이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중국이 장차 머리를 깎고 변발[剃髮]을 하게 될 조짐이었다. 지금처럼 중국인들이 머리를 깎는 제도는 과거 금(金), 원(元) 같은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서도 없었다. 명나라[皇明] 태조(太祖)와 같은 참다운 군주가 중국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백성은 이런 머리 모양에 익숙하고 풍속을 이룬 지 이미 백여 년이나 되었으니 머리를 다시 길러 묶게 하고[束髮] 모자[帽]를 쓰게 해도, 도리어 번거롭고 가렵다고 불편하게 여길 자가 나올 것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382).

셋째, 태학관에 머물면서 그곳에 있던 청나라의 고관 등 학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적은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서 연암과 필담을 나눈 청나라 학자 곡정(鵠汀) 왕민호(王民皥)의 의견을 아래 인용문으로 기록하였는데 내용은 청나라 풍습인 변발의 폐해와 망건의 폐해에 대한 것이다. 곡정은 변발과 망건은 우연히 발견되어 유행하고 결국에는 한족 여성의 발과 같이 명, 청대 남성의 머리를 압박하고 구속하여 불편하지만 버릴 수 없는 풍속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재액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선에 전족은 도입되지 않고 망건은 도입되었다. 망건에 대해 연암도 곡정의 의견에 동의했는지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청나라 학자의 당시 복식에 대한 의견이므로 함께 정리하였다.

곡정(鵠汀)은 “남당(南唐) 시절에 작은 발로 춤을 추어 후주(後主)의 마음을 녹였던 장소랑(張宵榔)이란 여자가 포로로 잡혀서 송나라 궁궐에 오게 되자, 궁녀들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작고 뾰족한 발을 흉내 내고 늑백(勒帛)으로 발을 꽁꽁 얽어매더니,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원나라 때에는 한족 여자들이 작은 발에 만혜(彎鞋)를 신음으로써 스스로 몽고 여자와 다르다는 표시를 하기도 했지요. 앞서 명나라 때에도 법으로 금했으나 막지 못했고, 지금 만주족 여자들이 한족 여자의 전각(纏脚)을 비웃으며 남자의 음탕한 마음을 돋우는 것이라 하니,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이것이 발에 가해진 재액입니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고황제(高皇帝)가 미복[微] 차림으로 도교 사원인 신낙관(神樂觀)에 갔답니다. 그때 한 도사가 실로 짠 망건(網巾)으로 머리칼을 묶는 것이 편리하게 보여서, 태조는 망건을 빌려서 쓰고 거울에 비춰보고 대단히 기뻐하였지요. 그리하여 그 방법으로 머리를 묶도록 천하에 명을 내렸답니다. 뒷날 점차로 말총 망건[鬉網]이 실을 대신하여 재갈 물리듯 꽁꽁 얽어맨 자욱이 머리에 남게 되었지요. (중략) 붓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이게 머리에 가해진 재액이지요.” 한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38).

Ⅲ. 박지원이 묘사한 조선의 복식자료

1. 조선 복식에 대한 묘사

연암은 조선인의 복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기록하지 않았고 명칭도 다양하게 나오지 않는다.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로 들어가는 도강일(渡江日)에 비장과 군뢰들의 복식 변화에 대한 기록을 다소 자세하게 남겼지만,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거의 남기지 않았다. 도강일의 복식 묘사를 보면 상방 비장이자 연암의 팔촌 동생인 박래원(朴來源)은 푸른 모시로 만든 군복을 착용하였고 비장들은 전립에 군복을 착용하였다. 연암은 주석을 달아 이들이 국내에서는 철릭을 입지만 압록강을 건너서는 협수(狹袖)로 갈아입는다고 따로 정리해 두었다. 또한 군뢰들은 전립을 쓰고, 협수와 전복을 입고 남색 전대를 띠었다. 이러한 차림들은 모두 융복과 군복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행단이 이동할 때의 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비장들은 벌써 군복(軍服)과 전립(戰笠)을 차려 입고 있었다. 이마 정수리에는 은화(銀貨)와 운월(雲月)을 세우고 공작우(孔雀羽)를 달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方紗紬)로 만든 전대(纏帶)를 묶었다. 허리띠에는 환도(環刀)를 차고 손에 짧은 채찍[短鞭]을 잡았다. 정사의 시중을 드는 상방(上房) 비장인 참봉 노이점(盧以漸)은 철릭[帖裏]을 입었을 때보다 더 호탕하고 건장해 보였다(원주-철릭[帖裏]은 방언으로 天翼이다. 비장은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철릭을 입지만, 압록강을 건너서는 협수(狹袖)로 갈아입는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30).
정사 행렬은 깃발[旗幟]과 곤봉(棍棒) 등을 선두에 열을 지워 펄럭거리며 성을 나섰다. (중략) 비복들의 고혜(藁鞋)가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상방 비장인 래원(來源: 연암의 삼종 아우)의 군복(軍服)은 푸른색 모시[靑苧]인데, 오래된 옷을 새로 빨아 입어서인지 너무 헐렁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지나치게 검소함을 숭상하는 듯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35).
군뢰들은 (중략)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친 전립(氈笠)에 술을 높이 달았고[鬉結高頂], 정수리에는 운월(雲月)과 천홍(茜紅)색 삭모[毦毛]를 달아매었다. 모자 앞에는 금빛으로 새긴 날랜 용(勇)자가 붙어 있고, 아청(鴉靑)색 마포(麻布)로 만든 협수(狹袖)·전복(戰服)에 붉은색[木紅]의 면포(綿布)로 만든 배자(褙子)를 입었다. 허리에는 남방사주(藍方紗紬)로 만든 전대(纏帶)를 맸고, 어깨에는 주홍색[朱紅] 면사(綿絲)로 만든 대융(大絨)을 걸쳤으며, 발에는 구멍이 뚫린 미투리[麻鞋]를 신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p. 46-47).

연암 자신의 복식 묘사는 거의 없지만 계절적인 특징으로 인해 흰색 모시로 만든 겹옷[白紵袷]을 착용하였다는 것을 「곡정필담(鵠汀筆談)」에 남겨두었다3). 삼사(三使)의 복식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성경(심양)에 들어갔을 때 삼사가 관복(冠服)을 갖추었다는 서술이 있다.

관운장 사당에 들어가 잠시 쉬는데, 삼사(三使)들은 모두 관복(冠服)을 갖추어 입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160).

2. 조선 복식에 대한 의견

조선 복식에 대한 연암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연암은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서 조선의 모자, 특히 양태가 넓은 조선의 갓에 대해 걱정하고,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서는 청나라 사람들이 정수리를 은과 공작 깃털로 장식하고, 갓끈을 늘어뜨린 전립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쓰고 있는 모자(帽子)는 양태[圓簷]가 지나치게 넓고 이마 위에 검은색 일산[黑傘] 같은 것을 걸치고 있으니, 처음 보는 것이어서 ‘이게 무슨 모자[冠]인가? 이상도 하다’라고 했을 것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478).
내가 쓰고 있는 갓[笠]은 전립(氈笠)과 같다. 소위입[笠]은 벙거지[範巨只]이다. 은을 새겨[鏤銀] 장식하고 정수리에는 공작의 깃털[孔雀羽]을 꽂았으며 목에는 수정의 갓끈[水精纓]으로 묶었으니, 저들 오랑캐의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51)4).

둘째, 연암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서 모자에 이어 조선인이 착용하고 있는 도포와 철릭의 소매가 넓은 것에 대해 중의 장삼처럼 너풀너풀하다고 하고 그로 인해 위험에 안주하고 있다며 걱정하였다. 소매가 넓은 옷에 대한 근심 한편으로는 사신 이하의 복장이 모두 각각이어서, 역관, 비장, 군뢰들이 각각의 옷을 입고, 역졸이나 마두(馬頭)들이 아예 옷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도 지적하였다. H. C. Kim(2009)는 연행 사행의 의식주를 살펴본 연구에서 특히 이러한 연암의 표현을 통해 일반 하인들은 여벌의 옷을 챙기지 못한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입고 있는 포[袍子]라는 것은 소매가 매우 넓어서 너풀너풀 춤이라도 추는 것 같으니, 처음 보는 것이어서 ‘이 무슨 옷[衣]인가? 이상하게도 생겼네’라고 했을 것이다. 만약 주공(周公) 같은 예법에 맞는 의관(衣冠)을 했더라도 처음 보게 되면 오히려 놀랍고 이상했을 텐데,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옷차림이 지나치게 크고 고색창연함에야 말해 무엇하랴. 더군다나 사신 이하의 옷[服]은 모두 각각이 아닌가. 역관 무리가 입는 옷[服]이 있고, 비장 무리가 입는 옷[服]이 있으며, 군뢰 무리가 입는 옷[服]이 있다. 역졸이나 마두(馬頭)들은 맨발에다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리고 바짝 말랐으며, 옷[布袴]은 해지고 찢어져 볼기짝과 허벅지를 가리지도 못한 채(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478).
무장(武將)들이 입는 복장을 이른바 철릭[帖裡]이라 하여 융복(戎服)으로 삼는데, 세상에 무슨 융복(戎服)의 소매가 승려의 장삼[僧衫]처럼 너풀너풀하게 생겼단 말인가. 지금 꼽은 여덟 가지 위험은 모두 소매가 넓은[濶袖] 한삼(汗衫) 때문이겠지만 그런데도 오히려 그 위험에 안주하고 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490).

셋째, 연암은 「동란섭필(銅蘭涉筆)」에서 우리나라의 포(袍)와 갓[笠]이 중국 중들의 옷과 쓰개와 닮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조선의 복식을 조롱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도사복을 표현하면서 우리나라의 도포와 닮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연암은 실제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연암은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복식을 받아들일 때 신라가 불교를 숭상한 국가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중국의 승려복을 받아들여 조선에 이르기까지 착용한 것으로 파악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중들이 거꾸로 조선의 의관 제도를 좋아해서 본뜬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그렇겠냐고 반문하였다. 이러한 연암의 추정이 그만의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 중들이 쓰는 갓의 색과 재료를 자세히 관찰하여 등립(籐笠)의 색은 조선의 초립(草笠)과 같고, 종립(椶笠)의 색은 조선의 주립(朱笠)과 같다고 기록했다. 연암은 조선의 풍속에 겨울에도 갓을 쓰는 것과 눈이 와도 부채를 쥐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의 포(袍)와 입(笠)과 대(帶)는 중국 중들의 그것과 무척 닮았다. 그들이 여름에 쓰는 것에는 등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종려나무로 만든 것도 있다. 포(袍)는 특히 방령(方領)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들의 포(袍)는 모두 흑공단(黑貢緞)이나 무늬있는 사[紋紗]로 만든다. 가난한 자들도 수화주(秀花紬)나 야견사(野繭絲)와 같은 고급 옷감으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다. 내가 의원 변관해(卞觀海)와 함께 옥전(玉田)의 한 점포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의 중국인이 우리를 에워싸고 베[布]로 만든 포(袍)를 다투어 구경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의아해 하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는데 “저 중들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는, 장난으로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석가가 설법하던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왔을 거야”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우리가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의 포(袍)와 입(笠)을 보고 자기들의 비렁뱅이 중들[乞僧]과 닮았다고 조롱한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여자와 중 그리고 도사들[道流]의 복장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지켜 바뀌지 않았다. 우리 동방의 의관(衣冠) 제도는 신라의 옛 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다. 신라는 처음에 중국 제도를 모방했으나, 세속에서는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여염(閭閻)에서는 중국의 승복(僧服)을 본받아 지금까지 천여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중국의 중들이 우리나라의 의관(衣冠)을 좋아해서 본뜬다고 거꾸로 말하고 있으니, 어찌 그렇겠는가?(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p. 380-381).
중국 중들이 쓰는 갓[僧笠]으로, 등나무 실로 엮어서 만든 것은 색이 우리의 초립(草笠)과 같고, 종려나무 실로 짠 것은 색이 우리의 주립(朱笠)과 같다. 등립(籐笠)은 종려나무 실로 무늬를 짜고, 종립(椶笠)은 등나무 실로 무늬를 넣는다. 몽고인들도 한여름에는 갓[笠]을 쓰는데, 대부분 가죽[皮]으로 만들고 도금(鍍金)을 하며 겉에는 운기(雲氣)를 그려 넣는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겨울 날씨에도 갓[笠]을 쓰고 눈이 와도 손에는 부채[扇]를 쥐고 있어 다른 나라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381).

넷째, 연암은 우리나라 선비들이 심의에 대해 그 제도는 왈가왈부하면서 어떤 옷감으로 제작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사정에 대해서 가소롭다고 하면서 지적하였다. 이 문장을 통해 연암이 옷 만드는 실질적 지식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심의(深衣)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하며 떠들썩하게 서로 이론을 다툰다. 소매나 깃의 길이[袪祫之間]를 두고서도 한 치 한 푼을 고집하여 자기가 옳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러나 정작 심의의 옷감을 두고는 삼베로 만드는 것인지 면포로 만드는 것인지[麻綿之間] 그 옷감[布]조차도 모른다. 어찌 대단히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180).

Ⅳ. 청나라 복식 문화 도입에 대한 박지원의 견해

복식 분야에서 청나라 문물의 도입에 대한 연암의 의견은 「일신수필(馹汛隨筆)」에 정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연암은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이 청나라에서 본 것 중 제일 장관을 말하는 것에 대해 일등 선비, 중간 선비, 삼류 선비의 비유를 통해 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일등 선비는 청나라의 변발(辮髮)과 역복(易服)을 내세워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 중간 선비는 오랑캐가 장악하고 있는 청나라에 쳐들어가 그들을 몰아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인데 비해, 연암은 스스로를 삼류 선비라 칭하면서 중국의 앞선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음 인용문과 같이 피력하였다. 연암은 당시 청나라의 우수한 기술을 모두 배워 그들의 무력을 넘어설 수 있을 때에야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연암은 일등 선비와 같이 변발과 역복에 얽매여 오랑캐의 것은 쳐다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간 선비와 같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이루기 위해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청의 선진 기술을 모두 배워서 그들의 무력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근거는 청나라에 중화(中華)의 법이 남아 있다[遺法]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中華)의 남겨진 법제[遺法]를 모두 배워서 우리의 어리석고 고루하고 거친 습속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이다. 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풀무질[耕蠶陶冶]부터 공업[工]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惠商]을 넓게 하는 데 이르기까지 저들에게 배우지 못할 것이없다.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우면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먼저 우리 백성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堅甲]과 날카로운 무기[利兵]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나는 삼류 선비[下士]이다. 나는 중국의 장관을 이렇게 말한다.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고, 정말 장관은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다고”(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p. 252-253)5).

둘째, 첫 번째와 같이 중국의 의생활 기술을 배우자는 맥락으로, 각종 수레 제도를 도입하자는 견해 중 연암은 누에고치를 켜는 소차(繅車)제도를 도입하여 누에고치에서 실뽑는 과정을 편리하게 하여 직조기술을 향상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누에고치를 켜는 수레인 소차(繅車)는 더욱 기묘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큰 톱니바퀴로 만드는 것은 맷돌을 돌리는 법과 동일하다. 소차의 양 끝에도 톱니바퀴를 만들어 들쭉날쭉하게 이가 맞물려 쉴 새 없이 돌아가게 한다. 소차는 몇 아름 되는 큰 얼레[大籰]이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고치를 켜는 법은 오직 손으로 당겨서 홀치는 것만 알지, 수레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명주실이 사람의 손을 타므로 이미 실로써 천연적이고 자연스런 품새가 없어지고, 실을 빼는 속도가 일정치 않아 실끼리 부딪치거나 맞닿을 때면 실과 고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함께 나아가 고치판에 쌓이기도 한다. (중략) 소차(繅車)를 사용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 효과나 속도가 어떠하겠는가? 누에고치가 여름을 지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비결을 물으니, 약간 데치면 나비가 되지 않으며 따뜻한 방[炕]에서 건조시키면 나비도 안 생기고 벌레도 나지 않아 겨울이라도 고치를 켤 수 있다고 한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p. 272-273).

셋째, 연암은 중국에서 전량 수입하는 털모자를 조선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모자 만드는 공정이 생각보다 쉬운데 많은 털 모자를 수입하기 위해 조선 은이 청으로 유출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毳帽]는 모두 이곳 중(中: 中後所)에서 나오는 것이다. 점포가 모두 세 개 있는데, 한 점포가 30~50칸이고 점포 안에서 작업하는 공인(工人)이 백 명은 더 된다. (의주)만상(灣商)들이 점포 안에 북적대며 돌아갈 때 모자[帽]를 실어 가려고 예약하고 있다. 모자를 만드는 방법[造帽之法]이 지극히 쉬워 양모(羊毛)만 있으면 내가 만들어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중략)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은(銀)을 한겨울 쓰고 해지면 버릴 모자[帽]와 바꾸고, 산에서 채굴하여 양이 정해져 있는 물건을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중국 땅으로 실어 보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인가?(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 323).

이상으로 살펴본 청나라의 발전된 기술인 소차 도입과 털모자 제작법 학습과 같은 것은 중화(中華)를 버리고 오랑캐의 복식을 받아들인다는 식의 이념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선진 의생활 기술을 도입하여 낙후된 조선을 발전시키자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한 것으로, 「허생전」에서는 비유를 통해 조선의 이상이자 이념에 해당하는 상투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 나라의 자제들을 뽑아 머리 깎고 변발을 하게 하고 오랑캐 복장을 입혀[薙髮胡服] 선비들은 빈공과에 응시하고, 일반 사람들[小人]은 멀리 강남까지 장사를 하게 만들어 그들의 허실(虛實)을 엿보고 한족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치욕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 대장이 낙심하고 허탈해서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예법(禮法)을 삼가 지키고 있거늘, 누가 기꺼이 머리를 깎고[薙髮] 오랑캐 옷[胡服]을 입으려고 하겠습니까? 허생이 대갈일성하며, 도대체 사대부가 뭐하는 것들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칭 사대부라고 뽐내고 앉았으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입는 옷이란 모두 흰 옷[衣袴純素]이니 이는 상복[喪之服]이고, 머리는 뾰족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만(南蠻)의 추결(椎結)이거늘 무슨 놈의 예법(禮法)이란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한을 갚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고 내주었고, 무령왕(武靈王)은 자기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호복(胡服)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명나라[大明]를 위해서 복수하려고 하면서 그 상투 하나[一髮]를 아까워한단 말이냐. 장차 말을 타고 달려 칼로 치고 창으로 찌르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하는 판에 넓은 소매[廣袖]를 바꾸지 않고, 그걸 스스로 예법(禮法)이라고 한단 말이냐?(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p. 240-241).

연암의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는 상국(上國)인 천자의 나라이자 중화의 나라인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강대국(强大國)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히 들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가 베풀어주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천자의 나라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청나라에 대해)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혜택[惠]이라고 생각할 뿐 은혜[恩]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를 근심[憂]으로 여기고 영광[榮]으로 여기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청나라가 상국(上國)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황제가 있는 처소를 일러 행재(行在)라고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면서도, 정작 나라에 대해서는 상국(上國)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문명국중화(中華)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나라의 힘에 굴복했으니 그들은 대국(大國)이다. 청나라는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킨 대국이지만 우리나라를 나라로 인정해 준 천자의 나라는 아니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260).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기술을 배워 조선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암은 「심세편(審勢編)」에서 청나라 선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조선의 상투와 의복이 중화의 문화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워 과시하고 중국의 모자와 마제수를 무시하는 지금까지의 행태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암의 견해에 대해서 M. S. Kim(2009)은 “박지원은 청이 이적(夷狄) 출신이기는 하지만 중국에 있던 중화(中華)의 문물을 가졌고 규모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므로, 조선이 추구하는 ‘북벌(北伐)’이라는 명분과는 별도로, 그 북벌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청의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보았다(p. 324).

중국의 붉은색 모자[紅帽]나 마제수[蹄袖]는 비단한족만 부끄럽게 여길 뿐 아니라 만족 역시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예속문물(禮俗文物)은 사방 오랑캐로는 당해 낼 수 없고, 또 중국과 겨루어 맞먹을 만한 것이라곤 한 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투 하나[一撮之髻]로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척한다. 이것이 둘째 망령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278).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적 언사에 익숙하지 못해, 어려운 것을 묻는데 급급하거나 당대의 일을 섣불리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 우리의 의관(衣冠)을 과시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관[服]을 부끄러워하는지 살피기도 하며, 혹은 바로 대놓고 한족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물어봄으로써 그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러한 행동은 비단 그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설픈 실수이고 역시 섬세하지 못한 짓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p. 282).

그런데, 연암 생각의 바탕에는 청의 지배하에 머리를 깎은 한족들과는 달리 조선인들은 의관을 유지하였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여전히 있었다. 연암 역시 조선의 일반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넓은 소매의 옷을 포기하지 못해 문약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귀결함으로써 청나라를 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머리를 깎고 오랑캐의 옷을 입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한족을 포로로 잡으면 잡는 대로 반드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정축년 회맹[丁丑之盟]에 따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는 깎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청나라 사람들 중 청나라 태종(太宗) 칸(汗)에게 조선 사람의 머리를 깎게 하자고 권한 사람이 많았는데, 칸은 묵묵히 듣고만 있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밀히 여러 패륵(貝勒)에게 말하기를, “저 조선은 본시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불리니, 그들은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자신의 목을 아끼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한다. 지금 만약 그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깎게 한다면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에 반드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니, 차라리 그 풍속[俗]을 따르게 하여 예의(禮義)에 속박시켜 버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만약 우리의 풍속을 배운다면 말 타고 활 쏘는 데 편리해질 것이니, 그건 우리에게 이로운 게 아니다.” 하고 마침내 논의를 중지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처지에서 논해 본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히 없을 터이고, 저들의 계산을 따져 본다면 다만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주 문약(文弱)하게 길들이려는 속셈일 것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p. 456-457).

이러한 연암의 생각은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간역졸과 마부들이 무영전의 뜰에서 한 행동을 표현한 아래 인용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은 우리의 역졸과 마부들이 무영전(武英殿)의 뜰이 터져나가도록 들어서서 마음껏 유람하고 구경하고 있다. 비록 저들이 명나라가 망하던 당시의 광경을 알 까닭은 없지만, 그래도 청나라 관인의 붉은 모자[紅帽]를 업신여기고, 소매 좁은 마제수[蹄袖]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자신들의 행색을 돌아보면 누덕누덕 기운 의복[衣袴]을 입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저들 비단옷[錦繡]을 입은 자들과 함부로 부딪치고 나란히 서서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꿀리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국을 높이는 존주양이[尊攘]의 대의가 미천한 비복들에게까지 뿌리박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변함이 없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구나(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3, p. 267-268).

복식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열하일기』의 도입부인 「도강록서(渡江錄序)」에서 연암은 그의 생각 근저에 대명의리론과 조선중화의식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혀두었다.

무엇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숭정(崇禎)이라는 연호를 일컫는가? 황명(皇明)야말로 진정한 중화(中華)이고, 우리 조선을 처음 국가로 승인한 상국(上國)이기 때문이다.(중략) 청나라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그 주인이 되니 선왕의 제도[先王之制]가 변하여 오랑캐 문화[胡]로 바뀌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수천 리의 우리나라는 압록강을 경계로 나라를 다스리며 홀로 선왕의 제도(先王之制度)를 지키고 있다. 이는 명나라 왕실이 오히려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밝히는 것이다(Park,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pp. 26-27).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 복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조선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생각을 넘어 청복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의견으로 보기는 어렵다. 연암은 청나라는 강대국일 뿐 오로지 상국은 명나라라고 하는 대명의리론을 기본적인 이념으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보존하고 있는 중화의 의관문물이 만족의 복식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수 성리학적인 관념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다만 청나라의 의생활에서 몇 가지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것과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조선 외관의 우월감을 지나치게 드러내지는 말고 그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연암은 조선의 넓은 소매를 걱정하고 줄이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북벌을 염두에 두고 조선의 의생활을 개선하자는 견해였다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본 연구는 조선후기 북학파의 대표 학자인 연암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타나는 복식 자료를 정리하고, 그의 청나라 복식과 조선 복식에 대한 생각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복식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간단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관원의 조주(朝珠)와 모자 정수리 장식과 같은 만족의 장신구 중 신분과 관직을 표시하는 기능을 한 것과 한족 여자의 전족(纏足)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하였다. 또한 연희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이 한족의 복식을 착용하는 것을 언급해 놓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연행사절이 가졌던 관심과 같은 것이었다.

둘째, 연암의 청나라 복식에 대한 의견으로 변발에 대해서는 청나라 학자의 표현을 빌어 한족 여성의 발처럼 남성의 머리를 압박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셋째, 연행사절이 착용한 조선의 복식인 군복, 융복 등에 대해서도 일부 소개했다.

넷째, 조선 복식 중 갓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 포류와 철릭의 넓은 소매에 대해 걱정스러워했다. 특히 도포와 갓을 중국 중들의 옷과 닮아 조롱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다섯째, 청나라 의생활 기술 중 누에고치를 켜는 소차 제도를 도입하여 직조 기술을 향상시키고, 중국에서 전량 수입하는 털모자를 조선에서 생산하여 은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낙후된 조선의 의생활 기술을 향상시키고 비용을 줄이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여섯째, 「허생전」의 비유를 통해 상투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그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으나 다른 서술에서는 연암 역시 조선 후기 지식인들과 같이 청의 지배하에 머리를 깎은 한족들과 달리 조선인들은 중화의 의관문물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상으로, 본 연구에서는 북학파 실학자의 대표 인물로 알려진 연암의 조선과 청나라 복식에 대한 견해를 다시 고찰해 보았다. 고찰 결과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청나라 복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한 부분과 부정적으로 서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본 부분에는 청나라 옷이 소매가 좁아서 활동성이 좋은 점, 소차 제도를 활용하여 직조를 보다 편하게 하는 점 등이 있었고, 더하여 조선에서 비싸게 수입하는 털모자 만드는 법을 익혀 자급자족하자는 것을 제안하였다. 부정적으로 본 부분은 역시 청나라에서 중화의 의관이 아닌 만족의 의관을 착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연암은 조선중화주의적 관념을 생각의 근저에 두고 일부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거나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고심하였다. 또한 그는 비유적인 글을 통해 청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청나라의 사정을 잘 알고 선진 기술을 익힐 필요에서 나온 견해로 볼 수 있었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19학년도 한경대학교 연구년 경비의 지원에 의한 것임.

Notes

1) Park, J. W.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1 (Kim, H. C. Trans.). Paju, Republic of Korea; Dolbegae. (Original work published 1901). p. 58, 「渡江錄」. 본 연구는 김혈조 역, 열하일기 1, 2, 3의 번역을 참고 및 인용하였고, 복식 용어는 한국고전번역원 자료를 참고하여 원문을 제시하였음. 이하 본문의 인용문에는 번역본의 권수와 페이지를 제시하였음.
2) <Fig. 1>은 Editorial Committee of China Complete Embroidery Apparel [ECCCEA: 中國織繡服飾全集編輯委員會]. (2004). China Complete embroidery apparel: Historical costumes Volume.2 [中國織繡服飾全集 歷代服飾卷(下)], Tianjin [天津], China: Tianjin People’s Fine Arts Publishing House [天津人民美術出版社], p. 480의 청대 조주 유물 사진이다.
3) Park, J. W. (2009). Yeolhailgi [열하일기] 2 (Kim, H. C. Trans.). Paju, Republic of Korea; Dolbegae. (Original work published 1901), p. 470. 「곡정필담(鵠汀筆談)」.
4) 이 문장의 원문은 “余所著笠. 如氈笠. 所謂笠範巨只. 飾鏤銀. 頂懸孔雀羽. 頷結水精纓. 彼兩虜眼中以爲如何.”로, 고전번역원의 번역을 함께 참고하였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70A_0070_01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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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Chaozou [朝珠] of Qing Dynasty (ECCCEA, 2004, p.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