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 Vol. 67, No. 5, pp.89-107
ISSN: 1229-6880 (Print) 2287-782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18
Received 01 Jul 2017 Revised 01 Aug 2017 Accepted 16 Aug 2017
DOI: https://doi.org/10.7233/jksc.2017.67.5.089

한국 근대 양복점의 판매 물품과 생산 및 판매 주체

김순영
전북대학교 의류학과/전북대학교 인간생활과학연구소 조교수
Sales Products and Production/Sales Subjects of Korean Modern Tailor’s Shop
Soon-Young Kim
Assistant Professor, Dept. of Fashion Design/Research Institute of Human Ecology, Chonbuk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Soon-Young Kim, e-mail: soonyoung1.kim@gmail.com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products that were sold at tailor shops in Korea from the 1890s to 1945, and explored the types of economic subjects related to the tailor shops and their main activities. The study was conducted by a literature analysis based on newspaper data. In the 1890s, clothes required by government offices were sold mainly in tailor shops, such as western formal wears, military uniforms, and police uniforms. In the 1900s and 1910s, the production and delivery of government uniforms became more popular. In the 1920s, main items sold at tailor shops were general clothes, such as men’s suit and outerwear, and there were a wide variety of product types. Also, sales of ready-to-wear clothing expanded greatly during this period. In the 1930s, dressmaker’s shop for women became popular. From 1938 to 1945, it was difficult for tailors to run a normal business under the wartime emergency economic system. Economic subjects who worked for the tailor shop included the owner, the chief, the clerk, the salesperson, the workers, and the apprentices. The owner was classified into two types: a tailor who made his own suits and a non-tailor. The chief was assumed to be the tailor who had the most seniority. The clerk worked as an employee of the shop. Among the clerks, the salesperson was dispatched to the outside, made an order, and received a payment. The worker was a producer who was in charge of the production of clothes. Among the workers, there were apprentices who were trained in tailoring and sewing.

Keywords:

clerk, salesperson, tailor shop, tailor shop worker, yangbok, yangjang

키워드:

점원, 외교원, 양복점, 양복 직공, 양복(洋服), 양장(洋裝)

Ⅰ. 서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검토하면서 양복점의 판매 물품의 종류를 살펴보고 양복점에서 양복의 생산 및 판매를 담당했던 경제 주체들의 종류와 그들의 활동을 고찰함으로써 한국 근대 양복의 변천사를 양복 생산자와 판매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 연구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근대 복식사 선행연구들은 근대 시기 양복이 확산일로에 있었으며 양복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문화가 확대되었음을 강조해온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양복의 개념 및 범주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으며, 양복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작되고 판매되었는지, 즉 구체적인 생산문화와 판매문화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남자 신사복의 변천에 관한 통시적 연구로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Park(1975)의 연구가 있으며 개화기의 양복 도입과 수용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연구로서 Kim(1987)의 연구가 있으나 이들은 양복 생산자의 관점을 다룬 연구는 아니었다. 양복 생산자의 관점에서 양복 근현대사를 기술한 것은 Kim(1990)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Kim(1990)은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00년간의 한국 양복 변천사를 통시적으로 개괄하면서 양복 확산의 배경과 유행 스타일, 양복인의 실명 추적과 양복단체의 활동 고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Kim(1990)의 연구는 근현대 100년에 대해 각 특성에 맞는 시대 구분을 시도하면서 양복의 태동과 흥망성쇠를 고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나 그의 연구는 주로 신사복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고 시기적으로 광복 이후의 양복사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일제 식민지기 양복점의 판매 물품과 생산 및 판매 주체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고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근대시기 양복의 개념과 범주를 먼저 검토하면서 양복점에서 어떤 종류의 상품들이 생산 판매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양복의 생산 주체 및 판매 주체가 누구였는가, 이들의 역할과 지위는 어떠했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 등과 같은 양복 생산과 판매 주체에 관련된 문제들의 해답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보고자 하였다.

근대 시기는 한국 패션이 태동된 시기이며 현재 한국 패션의 정체성과 방향을 이해하는데 토대가 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근대의 범위는 연구자마다 다소 다를 수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근대의 시대적 범위를 신문에서 양복점 광고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1890년대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로 설정하였다.

본 연구의 구체적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근대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검토한다. 둘째, 한국 근대 양복점의 판매 물품의 종류를 살펴본다. 셋째, 한국 근대 양복의 생산 및 판매 주체를 파악하고 그들의 활동을 고찰한다.

본 연구는 근대 시기(1890~1945년)에 발간된 신문을 조사하는 문헌적 연구이다. 연구에 이용된 신문자료는 『독립신문』, 독립신문영문판 『The Independent』, 『황성신문(皇城新聞)』, 『매일신보(每日申報)』,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앙일보(中央日報)』,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이다.


Ⅱ. 한국 근대 양복 및 양복점의 개념

본 장에서는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검토하고 이와 함께 양장과 양장점의 개념을 비교하여 살펴봄으로써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1. 양복과 양복점

양복(洋服)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 두 가지로서 하나는 ‘서양식의 의복’, 다른 하나는 ‘남성의 서양식 정장’을 뜻한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NIKL], n.d.). 현재 대중적으로 ‘양복’이라는 말은 ‘남성의 서양식 정장’을 의미하는 후자의 것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양복이 도입되고 정착되어간 20세기 초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사전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다. 즉 남성복뿐만 아니라 여성복이나 아동복의 경우에도 ‘양복’이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고 있었다(Beautiful, 1935; In this shop, 1908; Kim, 1934; Kobayasi, 1930; The appearance, 1926; Varying ladies’, 1935).

양복점은 ‘양복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로서(NIKL, n.d.) 양복의 제작소이거나 판매점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양복점은 때로는 양복상(洋服商)이라 불리기도 했다. 양복의 사전적 정의에서 미루어 짐작되듯이 근대시기의 양복점이 반드시 남성복만을 제작 또는 판매한 곳이라고 볼 수 는 없다. 1920~30년대 다수의 신문 기사들로부터 양복점에서 남성복과 함께 여성복과 학생복 등을 제작하거나 판매한 정황을 찾아볼 수 있었다. 1922년의 대동양복점 광고 문구에는 양복점에서 “신사복, 여자복, 또 학생복을 제재(製裁)”한다고 되어 있으며(Advertisement, 1922, p. 2), <Fig. 1>과 같이 1925년 종로양복점의 광고 그림에서는 신사와 숙녀가 나란히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양복점에서 부인의 외투 시가를 조사한 기록도 있으며(Spring adornment, 1927), <Fig. 2>와 같이 삼일양복점의 쇼윈도 마네킨에는 남성복과 여성복이 나란히 입혀져 있다.

<Fig. 1>

Advertisement of Jongno tailor’s shop(Western, 1925, p. 2)

<Fig. 2>

Show window of Samil tailor’s shop(Pilgrimage(5), 1938, p. 5)

2. 양장과 양장점

양장(洋裝)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옷차림이나 머리모양을 서양식으로 꾸밈, 또는 그러한 옷이나 몸단장’이며 다른 하나는 ‘책을 장정하는 방법의 하나’이다(NIKL, 2014). 복식과 관련해서는 전자의 의미로서 널리 사용되는데, 현재에는 여성복에 주로 쓰이는 용어이다. 그런데 사전적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양장’이라는 말은 여성복에만 국한된 용어는 아니었다. 1925년에는 ‘양장신사’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Donga ilbo newspaper reporter, 1925), 양장 또한 용어 사용 초기에는 남성복에도 사용 가능했던 용어로 이해된다.

사전에서 양장점은 ‘여자의 양장 옷을 짓고 파는 가게’로 정의되어 있다(NIKL, 2014). 양장의 정의에 성별이 명시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양장점의 정의에는 성별이 명시되어 있다. 즉 양장점에 대해 ‘여자의’ 양장 옷을 짓고 파는 가게로 정의한 점이 주목된다. 양장점은 양장과 달리 처음부터 ‘여자의’ 양장 옷만을 제작 판매하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장점이라는 명칭은 1930년대 후반부터 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Store management, 1937; The seriousness of, 1937). 양장점은 때로는 ‘부인양장점(婦人洋裝店)’(Pilgrimage(10)/(11), 1938) 또는 ‘부인아동양장점’(Attention, 1938)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즉 부인복이나 아동복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에 대해 양장점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부인양장점’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에 ‘부인양복부’(Winter preparation, 1932), ‘부인양복점(夫人洋服店, 婦人洋服店)’(Nowadays, 1908; Popular vote, 1935)이라는 명칭이 먼저 사용된 점도 주목된다. ‘부인양복점’에서 점차 ‘부인양장점’으로 명칭이 정착되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Fig. 3>은 1938년 로스테일러 부인양장점의 쇼윈도 모습이며, <Fig. 4>는 같은 해 미야고 양장점의 쇼윈도 모습이다. 두 그림에서 여성 양장이 마네킨에 입혀져 진열된 모습을 볼 수 있다.

<Fig. 3>

Sow window of Ross tailor dressmaker’s shop(Pilgrimage(10), 1938, p. 5)

<Fig. 4>

Show window of Miyago dressmaker’s shop(Pilgrimage(11), 1938, p. 5)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근대 시기 양복과 양장의 개념 및 양복점과 양장점의 개념을 정리해 보면, 양복과 양장 모두 근대 초기에는 명칭 자체에 성별을 구분하는 의미가 거의 없었으나 사용이 확산되면서 점차 양복은 남성복을, 양장은 여성복을 지칭하는 용어로 분리되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시기의 양복점은 ‘서양식의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학생복 등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로 정의되는 반면, 양장점은 ‘여성복과 아동복을 전문으로 만들거나 파는 가게’ 정도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Ⅲ. 양복점의 판매 물품

본 장에서는 주요 연대별로 양복점에서 제작되거나 판매된 물품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각 연대별로 찾을 수 있는 양복점 기사의 수가 균등하지 않았으므로 자료가 빈약한 연대는 선행 연대에 함께 묶어서 고찰하였다.

1. 1890년대 양복점의 판매 물품

신문광고에서 판매 물품의 종류가 확인되는 최초의 양복점은 1896년 9월 10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서울 종로(광쳥교 북쳔변) 소재의 쥬식회샤(Jusik Company)이다. <Fig. 5>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쥬식회샤는 1896년 9월 당시 유일한 한국인 회사로서 일류 재단사(first-class tailors)와 구두 제작자(shoe makers)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내부, 군부, 경무청에서 필요로 하는 갓, 신, 옷 등을 판매하였다. 영문 광고와 국문 광고 문구를 비교해볼 때 갓은 모자(hats), 신은 양화(洋靴, foreign shoes), 옷은 양복(洋服, foreign clothes)에 대응되는 표기로 판단된다. 내부, 군부, 경무청에서 필요로 했던 옷은 바로 서구식 예복, 군복, 경찰복 종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Fig. 5>

Advertisement of Jusik Company(Jusik company, 1896, p. 3)

주식회사가 1896년 9월 유일한 한국인 회사였으나 여기에서 일했던 ‘First-class tailors’가 어느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1897년 1월 무렵 조선에는 ‘괜찮은(ordinarily good)’ 남성복 수트(suits)를 만들 수 있는 한국인 또는 일본인 재단사(tailor)가 1~2명 정도 있었으며, 숙녀복의 경우는 중국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We know, 1897).

신문광고에서 판매 물품이 확인되는 최초의 외국인 양복점은 1897년 3월 9일 서울 장동의 Rikitake Tailor Co.이다. 이 회사는 봄/여름 옷(spring and summer clothes), 넥타이(neck ties), 셔츠(shirts), 칼라(collars), 커프스(cuffs)와 같이 일반 양복을 비롯한 다양한 양복 부속품을 수입 판매하였다(Tailors, 1897). 1897년 8월 에는 맞춤 양복점인 Yuentai(源泰)양복점이 서울에 본점을, 인천에 지점을 설립했다. 점주인 위엔타이는 중국인이며 조선에 오기 전 상하이의 외국인 양복회사에서 3년간 고용인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Notice, 1897). 당시 위엔타이 양복점에서 제작 판매한 양복은 가을/겨울용의 상등(고급) 양복이었다(Yuentai tailor shop, 1897).

1890년대는 양복점의 태동기로서 이 시기의 양복점에서는 정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서구식 예복, 군복, 경찰복을 비롯하여 각 계절에 적합한 일반 양복과 넥타이, 셔츠 등의 부속 상품을 판매했음을 알 수 있다.

2. 1900~1910년대 양복점의 판매 물품

1900년대에는 이전 시기보다 많은 양복점의 이름들이 신문광고에 등장한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는 대례복이나 군복과 같은 정부 관복의 제작 납품에 관한 기사가 많아진 점, 양복점에서 기성복 양복이 처음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점, 최초의 부인양복점(夫人洋服店)의 등장 등을 들 수 있다.

1900년대 일본인 양복점으로 고교(高橋)양복점, 등정(藤井)양복점, 곡택(谷澤)양복점, 천전(淺田)양복점, 원등(遠藤)양복점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 양복점에서는 주로 대례복, 군복, 상인복(商人服)을 제작 판매했다(All kinds, 1902; All of, 1905; Loss amount, 1904; Suit of, 1901; This tailor shop, 1902). 상인복은 비즈니스맨, 즉 상인(商人)의 정장인 신사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교(高橋)양복점은 스스로를 ‘군사용달상(軍事用達商)’이라고도 지칭했는데(Suit of, 1901), ‘용달상’이 상품이나 물건을 전문적으로 배달하는 상인임을 감안해 볼 때 군복과 부속품의 납품을 주로 하는 양복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4~5년 무렵에는 대례복과 같이 고급 기술이 요구되는 복식의 제조 납품을 전문적으로 하는 양복점도 생겼다. 원등(遠藤)양복점은 1904년 11월에 외교관의 대례복 주문을 맡았는데 당시 대례복 재봉을 조선에서 하지 못하여 견양을 들고 동경에 다녀오기도 했다(Going back, 1904). 그러나 1905년 1월에는 일본으로부터 숙련된 직공을 다수 용빙하여 조선 내 일본 공사관 복식과 대한제국 정부 복식을 전문으로 하는 양복점으로 자리매김했다(All of, 1905)

쥬식회샤 이후 신문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한국인 양복점은 1903년 김동석과 이필영의 일신양복점(日新洋服店)이다. 김동석과 이필영은 외국양복점 대방가(大方家)에서 고등제조법(高等製造法)을 졸업하고 수년간 고용되어 있다가 독립하여 양복점을 설립했으며 군복, 예복, 상복(常服: 신사복으로 추정됨)을 외국인 양복점에 비해 염가로 제조 판매했다(I graduated, 1903). 1905년에는 윤태훈과 이년응의 양복점이 개업했는데 이들은 원래 원등복송과 계약하여 영업하던 중 계약을 파기하고 자신들의 양복점을 했다(While I was, 1905). 윤태훈과 이년응은 ‘서양서 졸업해 온 재봉사’를 고용했으며 일반 양복을 비롯하여 문무관대례복과 학도복(學徒服)을 제작 판매하였다(Advertisement, 1905; This time, 1905). 한국인 양복점은 조금씩 증가하여 1906년 무렵에는 서울 소재 한국인 양복점이 10여개 정도 되었다고 한다(Kim, 1990). 신문에서 점포명이 확인되는 한국인 양복점으로 1908년 김영주의 한성양복점, 1909년 김상렬의 대흥양복점, 강재원의 일등양복점 등이 있다(I lost, 1909; I served, 1909; The other day, 1908). 1909년 개점한 일등양복점은 점주 강재원이 개점 이전에 궁내부 어용으로 6~7년간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통상복, 외투 등의 일반 양복과 학생복뿐 만 아니라 문무관 대례복, 통감부 관복까지 제작 판매했다(I served, 1909).

1904년 10월에는 근대시기의 대표적인 양복상(洋服商) 정자옥(丁子屋)이 서울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This time, 1904). 처음에 정자옥은 미국에서 십 여 년 재봉을 연구한 봉재사(裁縫師) 궁기영태랑(宮崎榮太郞)을 초빙하여 구미최신유행 양복을 제작했다(An invitation, 1904). 1905년에는 정자옥의 기성양복광고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New arrival, 1905), 이로써 양복점에서 기성복양복을 판매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09년 10월에 정자옥은 업무를 더욱 확장하여 2개의 분공장을 신설하였고 급한 주문에도 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New arrival, 1909).

이 시기에 정자옥은 스스로를 ‘제관서어용달양복점(諸官署御用達洋服店)’이라 칭하기도 했다(New arrival, 1909). 이 칭호로 볼 때 정자옥이 정부 관원의 양복 제작과 납품을 맡았던 양복점 가운데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옥 이외에도, 단발한 궁내부 관원들(뎡감, 소뎡, 싀탄슈, 원역 등)의 양복을 제작 남품했던 다른 일본인 양복점들도 존재했다(Suit order, 1908; Wonyeok attire, 1908). 정자옥의 양복은 양복지 직수입으로 인해 보통 양복 가격보다 1할 이상 저렴한 편이었으며(New arrival, 1909), 1914년 무렵에는 품목도 다양해져서 기성복 오바코트와 돔비(돈비, 인버네스: 케이프가 달린 오버코트의 일종), 망토 등을 판매하였다(Year-end sale, 1914).

양복점의 점주가 여성인 경우도 있었다. 1908년 부인양복점(夫人洋服店) 광고 문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현금시대는 남녀를 물론하고 영업에 종사하여 생활상에 충만케 하는 것이 정당한 고로 본인이 비록 여자오나 재봉을 졸업하여 남녀양복을 선명 제조하여 전국 형제자매에게 수구수응 하겠사오니 속속 래구하심을 앙망함”(Nowadays, 1908, p. 3)이라고 하여 여성을 점주로 하는 양복점의 존재가 확인된다. 가게의 이름을 ‘부인양복점’이라고 명명한 것이 특이한데, 점주가 ‘여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부인양복’에 대한 전문성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로 짐작된다. 1908년 여성 양복점주의 존재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3. 1920년대 양복점의 판매 물품

1920년대가 되면 이전시기에 자주 볼 수 있었던 대례복과 군복 등의 광고가 거의 사라지고 신사복, 외투 등의 일반 양복 광고가 대량으로 등장한다. 양복은 정부 관리들의 예복이나 군복, 경찰복과 같은 특별한 용도를 위한 옷에서 출발했으나,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인의 의생활에서 ‘통상복’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Prices, 1922). 이 시기에는 양복점의 수도 많이 증가했다. 1924년 서울 소재 중국인 양복점의 수가 14개 정도였으며(Money paid, 1924), 1926년 서울의 한국인 양복점 수는 약 7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Kim, 1990). 1920년대 양복점 판매 물품의 특징으로는 상품의 다양화 및 세분화 경향, 대량생산된 기성복의 제작 판매 확대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양복점에서는 모닝 코트와 같은 예복류, 신사복(세비로)과 외투(겨울 외투, 스프링 코트, 레인 코트, 인버네스) 등의 일반 양복, 학생복, 부인복, 아동복, 작업복을 비롯하여 와이셔츠, 넥타이, 메리야스, 중절모, 신사화 등의 잡화류, 주단 포목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유형의 상품을 판매했다(Autumn, 1925; Big sales for readymade, 1928; Ready-made, 1925; Sales day, 1926; Spring big, 1928; Summer big, 1928; The cold, 1921). 하나의 유형 내에서도 상품 구색이 다양하여 세부 품목이 많았으며 다양한 소재 및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이 판매되었다. 예컨대, 1926년 정자옥 양복점에서는 두 종류의 오-바를 판매했는데 하나는 ‘기성 오-바’, 다른 하나는 ‘주의용 오-바’였다(Sales day, 1926). 여기서 ‘기성 오-바’는 기성복 일반 양복 코트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주의용 오바’는 그 외형이 주의와 같거나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모직물 코트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의용 오바’는 두루마기에 익숙한 한국인들을 위해 고안된 한국형 외투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양복점에서 판매된 메리야스에도 모(毛), 이모(裏毛), 반모(半毛), 고급모(高級毛) 등 소재에 따라 다양한 상품이 존재했다(Gathering for, 1927; Sales day, 1926)

이 시기 상품의 다양화 및 세분화 경향은 대량생산 시스템 기반 기성복 제작 판매 확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20년대 양복에는 주문복과 기성복이 공존했다. 기성복 판매는 정자옥을 비롯한 몇몇 일본인 양복점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정자옥은 1909년에 스스로를 ‘제관서어용달양복점’이라 내세웠으나, 1922년에는 ‘레데이 메-도 스도아’를 자칭하며 기성복 판매에 대단히 집중하였다(Practical summer, 1922). 정자옥의 주요 판매 물품이 관청 어용 양복에서 일반 기성 양복으로 옮아간 것이다.

1922년 당시 정자옥에는 ‘기성양복부’와 함께 ‘주문양복부’가 공존했다. 기성 양복이 세분화된 촌법(寸法: 사이즈) 체계를 토대로 대량 생산된 비교적 염가의 양복이었던 반면, 주문 양복은 맞춤복으로서 고급 양복을 추구했다(Conduct an economic, 1922; Trend news, 1922; Wool and Western, 1922). 1920년대에 정자옥은 특히 기성양복 판매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Fig. 6>과 같이 광고에서 남녀 한복 위에 각각 양복 외투와 망토를 착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는 여전히 한복에 익숙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복과 양복의 코디 제안을 통해 기성 양복의 판매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광고 전략이었다. 원래 망토나 외투는 여학생이나 어린 소녀들이 겨울에 방한용으로 입던 옷이었으나 점차로 부인들도 겨울 방한의로 착용하기 시작했으며 1927년 무렵에는 기생이나 여염집 부인들이 봄철에도 많이 입을 정도로 유행이 확산되었다(Spring adornment, 1927).

<Fig. 6>

Mantle and coat worn over Hanbok, Korean traditional dress(Conduct an economic, 1922, p. 1)

정자옥은 1925년에 ‘양장잡화부’를 신설하여 모자, 와이셔츠 등의 판매를 더욱 확대했다(Autumn, 1925; Celebration, 1925). 정자옥은 양장잡화에 머무르지 않고 연이어 조선의 재래직물시장까지 판매영역을 넓혔다. 1926년에 ‘주단포목부’를 개설하고(Big sales for dress, 1926), 순백색주단포목과 한산모시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Big sales for white, 1926; Supreme white-ramie, 1927).

1927년 정자옥의 부인복부에서는 수십 종의 케-프를 판매할 정도로 케-프의 디자인도 다양해졌다(Trendy cape, 1927). 케-프는 부인들이나 여학생들의 외출용 모직 방한의인데, 그 중 하나는 <Fig. 7>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길이가 무릎 아래 정도였으며 칼라를 펴면 귀까지 충분히 덮을 수 있는 넓은 칼라가 달린 모양이었다. 망토 보다는 길이가 짧은 편이었다. 1927년 봄에는 기생과 여학생, 신여성들 사이에 ‘어깨에 익살맞은 주름이 잡힌 신식 만도’가 유행했는데, 당시 보통 부인네들은 기존의 ‘아무 주름이 없는 구식 만도’를 입었다고 한다(Spring adornment, 1927). 어깨 주름의 유무로 볼 때, 당시의 ‘신식 만도’는 <Fig. 7>과 유사한 형태, ‘구식 만도’는 <Fig. 6>의 부인의 망토와 유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Fig. 7>

Cape look(Trendy cape, 1927, p. 4)

1920년대에 정자옥은 신사복에서 시작된 기성복 사업을 여성복, 아동복까지 확대하고 신발, 와이셔츠, 넥타이 등 잡화부문까지 더욱 확장시킨 후 심지어 일부 재래직물시장까지 판매 영역을 확대해 갔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일부 양복점의 대량생산 기반 기성복은 양복 품목의 다양화 및 세분화를 가능하게 했던 토대임과 동시에 이로써 증대된 양복점의 자본력은 양복과 관련 없는 다른 영역으로까지 사업 확장을 가능하게 한 기인으로 작용하면서 한국인의 의류·직물 시장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 정자옥은 1층의 레디-메드부를 확장하고 ‘양복은 필히 기성복에 한 한다’라고 천명하며 ‘레디-메-드 만능시대’를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했다(Ready-made, 1927).

기성복은 1927년까지 대부분 정자옥의 독점 판매로 이루어지다가 1928년 이후부터는 다른 일본인 양복점으로 확대되어 갔다. 기성복 시장이 커짐에 따라 기존의 맞춤 양복점들 가운데 자본력을 갖춘 일부 양복점들도 기성복 사업에 진출했다. 기성복 양복점은 1927년 12월 무렵까지는 경성에서 정자옥이 유일했으나(Complete, 1927), 1928년 3월 이후부터는 백목옥(白木屋)양복점, 마도(馬渡)양복점 등 다른 양복점에서도 기성복을 판매하였다(Big sales for ready-made, 1928; Big sales for spring, 1928).

기성복 양복점과 달리 주문 제작 판매를 기본으로 하는 맞춤 양복점에서는 기성복 양복점에서 취급한 품목 가운데 맞음새가 중요한 품목인 남자 신사복과 외투를 기본으로 하여 부인 망토와 외투, 학생복을 주로 제작 판매했다(Advertisement, 1922; Jongno tailor's shop, 1929; Opening ceremony, 1922; Spring adornment, 1927; Store pilgrimage, 1929). 그러나 맞춤 양복점도 어떤 식으로든 기성복 양복점의 다양한 상품 구색과 빠른 생산 판매 시스템에 대응해야 했다. 일부 맞춤 양복점에서는 기성복 완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반제품을 대량으로 제작해 두고 고객이 주문하면 12시간 이내에 완성해줌으로써 기성복의 빠른 속도와 주문복의 맞음새라는 두 가지 장점을 결합시킨 부인복을 판매하기도 했다(End-of-year, 1928).

4. 1930년대 평화시기(1930~1937년) 양복점의 판매 물품

1930년대는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1920년대에 이어 양복점의 호황이 계속되었으나 중일전쟁 이후부터 광복 이전까지는 전시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기로서 양복업계에 큰 변화와 타격이 있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930~37년까지의 시기를 평화시기로, 1938~1945년까지의 시기를 전시로 명명하여 각각을 따로 고찰하였다.

1930년대 평화시기의 양복점 판매 물품은 192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양복의 확산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부인복 전용의 맞춤 양복점(양복부)의 증가,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상업 시설의 등장으로 인해 양복점의 판매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점 등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백화점 매장에서의 판매 물품을 모두 고려한다면 이 시기에 판매된 상품 유형과 종류가 더욱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본 연구의 대상이 양복점에 국한되므로 백화점의 판매 물품은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이전 시기에 매우 요란하게 등장했던 정자옥의 기성복 광고는 1930년대가 되면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정자옥 이외에 다른 양복점의 광고들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정자옥의 양복 광고가 사라진 것은 다름 아니라 정자옥이 더 이상 ‘양복점’이 아닌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상업 방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1927년 5월 이미 정자옥은 발전 전략으로서 ‘대백화점 건설’을 발표하고 일대 약진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Construction of, 1927). 정자옥은 1929년과 1930년에 각각 점포의 신·증축사업을 완공하여 5층의 대형 매장을 구축하였는데, 1층은 양장잡화, 화장품, 모자, 구두, 부인잡화, 조선주단의복매장으로, 2층은 양복, 기성복, 오복(吳服: 일본 견직물), 부인용품, 양산매장으로, 3층은 부인복, 아동복매장 등으로 구성하였다(Busan Modern History Museum, 2013). 이로써 1930년대의 많은 중소 양복점들은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뿐 만 아니라 정자옥과 같은 대형 백화점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Discussion, 1932; The second discussion, 1931).

1930년대가 되면 “너나 업시 다 입는 양복”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양복이 대중화되었다(Hongseon, 1932, p. 4). 양복 착용의 확산은 양복점 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1932년 무렵에는 한국인 양복점 수가 80여개에 달했으나(Hongseon, 1932), 1938년 무렵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한국인 양복점이 200여개소가 넘었고(Factory, 1938), 서울 시내 전체 양복점 수가 약 600여개에 이를 정도였다(Pure wool corning, 1938).

이 시기 기성복 양복점과 맞춤 양복점의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1920년 대와 마찬가지로 기성복 양복점이라 할지라도 기성복 판매와 주문복 제작을 병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도(馬渡)양복점은 기성복 위주였는데, 신사복, 외투(오버, 돈비, 학생외투), 부인복(부인오버, 코트, 케-프), 학생복(소창학생복, 소학생복), 잡화(와이샤스) 등을 판매하였다(Big sales for ready-made, 1930). 맞춤 양복점에서는 신사복과 외투, 학생복 등을 주로 판매하였다(A suit, 1936; Coat, 1934; Theft from, 1932; Thieves break, 1936). 양복 기술이 탁월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것으로 평판이 난 일부 맞춤 양복점들은 매일 양복 주문이 쇄도하기도 했으며(A good, 1933), 한 달 매상이 2~3천원에 달할 정도로 영업 실적이 우수한 맞춤 양복점도 있었다(Today’s success, 1933).

1930년대가 되면 부인들도 두루마기 대용으로 케푸(케이프)나 외투 같은 것을 더 많이 입게 되었다(Winter preparation, 1932). 지금까지 부인복은 아무래도 남자 양복에 비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 양복점의 틈새 일이거나 기성복 매장에서 구매되는 것이 보통이었다(Winter preparation, 1932). 그러나 1932년이 되면 한국인 백화점에도 ‘부인양복부’가 생겨서 마음에 드는 옷감과 모양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Winter preparation, 1932), 지방에까지 ‘부인양복점’이 생기면서(Comport for, 1935) 부인복 전용의 맞춤 양복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34년 무렵에는 양복이 더욱 확산되어 어린이들의 양복, 여학생의 제복, 직업 부인의 양장을 골목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떤 가정에서든 가족 전체는 아니더라도 반수 이상은 양복을 입게 되었다(Beginning, 1934). 경제가 넉넉한 사람은 백화점 양복부 혹은 양복점에서 양복을 사입었고, 넉넉지 못한 사람은 야시장에서 품질이 낮은 양복을 사 입는 것이 통례였다(Beginning, 1934).

이처럼 양복 구매와 양복 착용이 확산되자 주문 양복의 비싼 가격과 기성품의 저급한 옷감 및 튼튼하지 못한 바느질이 의생활 문제 중 하나로 부각되기도 했다. 신사 양복 한 벌의 값은 약 60원으로 이 돈은 ‘네다섯 식구가 한 달에 먹고 사는 반찬값’과 같은 가게 지출이었다(To buy a suit(First), 1937), 이 정도의 금액은 일반 가정으로서는 당연히 큰 부담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가정의 주부들이 직접 양재에 대한 지식과 기능을 배워 가족들에게 손수 양복을 지어 입히도록 권장되었다(Before, 1934; Beginning, 1934). 또한 주문품의 경우 무작정 맞추지 말고 각 부분(양복감, 부속품, 바느질값 등)의 가격을 꼼꼼하게 확인할 것과 기성품의 경우에는 꾸준한 품질 향상의 필요성 등이 제안되기도 했다(To buy a suit(Second), 1937).

5. 전시(1938~1945년) 양복점의 판매 물품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면서 식민지 조선의 각종 정책이 재편되고 본격적으로 전시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Ha, 2006). 이 시기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는 일제의 전시통제경제 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표적 소비재 연관 업종 가운데 하나인 양복점은 이전 시기에 경험하지 못한 커다란 변화와 타격을 겪게 되었다.

신조 양복 구입에 대한 제제는 관청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9월 각 관청을 통하여 “양복은 될 수 있는 대로 해 입지 말되 정 부득이하거든 족기만은 빼고 해 입으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관공서원들은 새 양복 주문을 주저하게 되었다(Be good, 1937, p. 2). 그 결과 양복점에서는 예년 대비 20~40% 주문 감소 현상이 나타났고 양복지 재고도 쌓이게 되었다(Be good, 1937).

1938년 2월 무렵부터 장기항전에 대응하기 위해 면모, 견, 기타 섬유를 위주로 하는 경공업계에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었고 원모의 사용 제한, 원료 면화의 수입제한, 소비 배급의 통제 등에 의해 복식업계에 일대 이변이 야기되었다(Pure wool business, 1938). 양복의 원료인 순모품과 혼직지 등의 가격이 오르면서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양복가가 따라 오를 것이라는 불안감도 증폭되었다(Factory, 1938). 따라서 1938년 봄에는 모직 양복을 예비로 미리 주문해 두려는 사람들로 인해 양복 주문이 폭등하면서 양복점과 백화점 등에서는 비정상적인 매상 증진이 일어나기도 했다(Factory, 1938; Preview of, 1938; Pure wool business, 1938). 양복점의 일시적 호황을 반증하는 듯 1938년 4월에는 양복점 쇼윈도 순례 기획 기사가 연재되기도 했다(Pilgrimage(5)/(13)/(14), 1938). <Fig. 2>와 <Fig. 8>에서 알 수 있듯이 1938년 봄 양복점에서는 모닝코트, 신사복, 부인복 등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었다.

<Fig. 8>

Morning coat and sack coat displayed in the show window of Daegyeong tailor’s shop(Pilgrimage(14), 1938)

그러나 1938년 가을부터 양복 매출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양복점들은 경영난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일부 양복점들은 전시 경제 하의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양복 수선에 집중하기도 했으며(A dynamic, 1938), 종래의 일반 양복 제조에서 관청 관리복이나 국방복 제조로 전환하는 양복업자도 있었다(Wartime, 1938). 기성복을 주로 판매했던 양복점의 경우에는 상품 사입이 원활하지 못하여 상점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상점에 작업장을 설치하고 자가 제조를 행하기도 했다(Faced with, 1938).

1940년대 양복점 기사에서는 신사복이나 외투와 같은 일반 양복의 판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양복점에서는 소학생복, 중학생복, 작업복, 승마복, 경방단복, 노타이 내의 정도의 상품들이 판매되었다(A tailor, 1940; Prosecution, 1941). 전시경제가 심화되면서 일반 양복의 제작 및 판매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업계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Ⅳ. 양복의 생산 및 판매 주체

본 장에서는 양복점에서 양복을 제작하거나 판매했던 사람들을 양복의 생산 및 판매 주체로 이해하고 이들의 종류와 역할, 주요 활동을 고찰하였다.

1. 점주(店主), 주임(主任)

점주는 양복점의 경영 주체이다. 양복점이 양복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이므로 양복점의 점주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양복 제작 기술을 이해하고 있거나 오랫동안 연마해온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점주가 다 양복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자옥 양복점은 초기 광고에서 스스로를 양복전(洋服廛) 또는 양복상(洋服商)이라고 지칭했고 미국에서 재봉을 연구한 봉재사를 초빙해 와서 영업을 했다(An invitation, 1904; This time, 1904). 1905년의 윤태훈과 이연응 양복점도 서양에서 졸업해 온 재봉사를 고빙하여 영업하였다(This time, 1905).

양복점의 점주가 ‘양복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양복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대별되는 정황은 1926년 평양 양복공 동맹파업에 대한 점주들의 대응을 전한 다음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양복상조합에서는 점주이면서 양복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태도가 매우 강경하나 양복을 지을 줄 모르는 점주 중에는 태도가 연약하여져서 어떤 정도까지의 양보를 하고 다시 복업을 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음으로 양복상조합에서는 결국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는 기사이다(Both sides, 1926, p. 5). 지방의 소규모 양복점의 경우 점주가 주문을 받고 수금을 하러 다니는 등 점원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경우도 있었다(Young businessman, 1932).

점주들은 조합을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양복가격을 조절하거나 직공을 구인하는 등 각종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기도 했다. 신문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한국인 양복점 조합 설립기록은 1908년의 것인데, 1908년 7월 28일 라수영, 이승근, 김연규 씨 등 28인의 발기로 경성의 양복점주들이 모여 조합을 결성하였다(The association, 1908). 1920년대에는 양복점조합이 지방에서도 결성되었다. 1921년 4월에는 평양의 한국인 점주들이 모여 평양양복점조합을 조직하였다(Foundation of, 1921), 한국인 양복점주들의 조합은 1920년대 이후 수차례 이름을 바꾸거나 조직을 개편하며 ‘양복상조합’, ‘경성양복기공조합’, ‘한성양복상조합’ 등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인 점주들 역시 ‘기성복조합’, ‘경성양복조합’ 등을 결성하여 한국인 양복점과 경쟁하며 각종 현안에 대응하였다(Kim, 1990). 양복점 점주들은 양복점 경영 외에도 재난시 구제금(구호금)을 기부하거나 각종 행사에 의연금품을 기증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1920년대 이후의 양복 광고에서는 점주 이외에 주임의 존재가 확인된다. 주임은 ‘직장에서 어떤 일을 주로 담당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데(NIKL, n.d.), 당시 맞춤 양복점의 주임은 점주 바로 아래 또는 동급의 위상으로서 주로 양복기술을 가진 자 가운데 가장 상급자, 즉 재단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장안양복점의 광고 말미에는 점주와 주임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으며(Partnership, 1920), 1922년의 영미식양복점 광고에도 점주, 재단주임, 점원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Opening ceremony, 1922). 1922년의 대동양복점 광고와 세흥양복점 양복실습생 모집광고는 아예 점주 없이 주임의 이름으로만 되어 있다(Advertisement, 1922; Special recruitment, 1922). 양복 기술과 관련된 부분에서 주임의 권한이 상당했음을 엿볼 수 있다.

기성복 양복점이나 백화점에는 맞춤 양복점의 주임과는 다른 직무를 맡은 주임도 존재했다. 1922년 정자옥양복점의 ‘취급주임’은 물품배송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으며(Great good news, 1923), 1930년대 모 디파트(백화점) 양복부의 주임은 고객의 구매동향을 분석하고 재고를 파악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Pure wool business, 1938).

2. 점원(店員), 외교원(外交員)

점원과 외교원은 양복점에서 양복의 판매 활동 및 영업 활동에 종사한 경제 주체들이다. 1920년 대 이후의 양복점 관련 기사에서는 점원과 외교원이 자주 등장한다. 점원은 양복점의 고용인으로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예컨대, 주문을 받기위해 양복지 견본을 들고 고객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나 양복대금을 수금하는 일, 가게에서 상품을 내어와서 고객에게 보여주는 일, 고객과 대화를 나누며 응대하거나 고객의 치수를 재는 일, 가봉, 물품납입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Clerk, 1939; New clerk, 1938; Store reformation, 1933; Theft and, 1935; Winter clothes, 1927). 지방의 소규모 양복점인 경우에는 점주가 곧 점원인 경우도 있었으며(Young businessman, 1932), 서울 시내의 맞춤 양복점의 경우에는 점원이 6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New clerk, 1938).

외교원은 교원(交員)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양복점 점원의 일종으로서 고객들의 집을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양복 주문을 성사시키고 계약금을 받아오는 업무를 담당했다(Someone who, 1937). 오늘날의 방문판매 영업사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교원은 양복주문과 동시에 계약금 수취를 했기 때문에 현금을 취급하는 업무 특성상 횡령사건으로 기사가 난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A tailor, 1937; Embezzled, 1923; Salesperson of, 1932; Salesperson on, 1938; Salesperson thieves, 1934). 여성이 양복점의 외교원으로 근무한 경우도 있었는데(A wife, 1935), 여성 외교원의 업무는 주로 부인 양복과 관련된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상점의 합리적 경영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다. 이에 따라 양복점에서는 외교와 월부판매의 중단, 교육수준이 높은 점원의 채용, 점원 또는 제작자가 직접 고객의 취향이나 연령에 맞는 일대일 응대 등의 경영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New clerk, 1938; Reasonable, 1938). 점차 외교원의 활동이 줄어들고 점원의 교양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9년 양복점 점원의 월급은 50~60원 정도였는데 이 정도의 월급이면 결혼을 해서 가정생활을 꾸릴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Family, 1939a; Family, 1939b).

3. 직공(織工, 職工), 도제(徒弟)

직공과 도제는 양복점, 또는 양복점 소속 공장에서 양복의 생산 활동에 종사한 경제 주체들이다. 직공은 양복의 제작 업무를 책임진 생산자이다. 직공의 숙련된 기술은 양복의 상품 가치와 직결된 사항이었으므로 직공은 고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복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양복점의 개점 광고나 홍보 광고에서는 숙련된 직공을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양복 품질을 보증하는 경우가 많았다(Bosin, 1934; Loss amount, 1904; New arrival, 1923; Opening ceremony, 1922).

1920년대 이후 세계노동운동과 노동단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양복직공들도 조합을 결성하여 공동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1922년 10월 서울 재동의 경성강습소에서 남녀양복직공 80명이 모여 ‘양복직공조합(洋服職工組合)’을 발기하였고(Gathering, 1922), 1920년대 중반에는 진남포와 회령 등 지방에까지 직공조합이 만들어졌다(Both sides, 1926; Formation of, 1924; The union, 1926). 직공들은 직공조합에 가입하여 연대하며 주로 임금문제나 차별대우, 노동시간문제 등에 함께 대응했다(Bujeonok, 1931; Despotic, 1926; Sixty workers, 1929; The strike, 1930a; Workers of Bukcheong, 1932). 또한 직공끼리는 서로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고 ‘본래 빈핍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더 어려운 동료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하거나 국가적 재난에 푼푼히 모은 돈을 구제금으로 내기도 하는 등 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Joseon famine, 1925; Reception, 1924; Warm heart, 1924).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개선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양복점의 직공들은 종종 동맹파업을 했다. 양복 직공들의 동맹파업은 양복직공조합 성립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1921년 6월에 일본인 양복점 3곳(양복상 각전(角田)상점, 부전옥(富田屋)양복점, 정자옥양복점)에서 한국인 직공 95명이 연합하여 파업을 결행한 기록이 있다(Ninety five, 1921). 일본인 양복점에는 한국인 직공들이 많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1927년 정자옥의 경우 한국인 점원과 직공[工手]이 전체의 7할이었다고 한다(History and, 1927).

일본인 대형양복점에서의 직공 파업은 이후에도 수차례 더 발생했다. 1926년 각전상점의 양복부 직공들이 감독의 포학과 회사의 대우냉혹으로 인해 동맹파업을 했으며(Despotic, 1926), 1929년에도 정자옥양복점의 직공 60명과 부전양복점의 직공 45명이 임금문제로 파업을 단행했다(Forty workers, 1929; Sixty workers, 1929). 백석(白石)양복점의 직공 20여명이 임금문제 등으로 동맹파업을 하자 동 양복점의 소속공장 7곳의 직공 30여명이 동정파업을 하기도 했다(The strike, 1930a).

양복직공들이 파업을 하면 양복기공조합(洋服技工組合)에서 위원이 출동하여 쟁의를 조정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Settle, 1929; The strike, 1930b; The union, 1930). 양복기공조합은 한국인 양복점주들의 조합이었던 양복상조합이 1924년 개칭된 것이었다(Kim, 1990). 한국인 양복점주들이 일본인 양복점에서 일하는 한국인 양복직공들의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쟁의 조정에 나서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복직공(재봉공)의 임금에 관해서는 1931년 1월 1일의 기사를 참고할 만하다. “양복공으로 능난한 사람은 하루 수입이 4, 5원이 되었지만 이것은 이전 이야기요 요새 와서는 그 절반이 될락 말락 하고 족긔 방직공 같은 이는 하루 수입 7, 80전 내지 1원 가량”이라고 하였다(Life by, 1931, p. 18). 양복 직공의 수입은 기술의 숙련 정도에 따라서 차등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복직공의 수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1938년 무렵 서울 시내에 있는 한국인 양복점 수는 200 여개소가 넘었는데 여기에서 일하는 직공의 수가 수천에 달했다고 한다(Factory, 1938). 서울 시내 외국인 양복점이나 지방의 양복점에서 일하는 직공까지 감안한다면 직공의 수가 대단히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Fig. 9>는 1938년 8월 서울양복점 공장에서 직공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이다. 발재봉틀을 돌리는 재봉사를 가운데에 두고 주변의 좌식 작업대에서 메리야스를 입은 직공들이 바느질과 다림질 등을 하고 있다.

<Fig. 9>

Workers of Seoul tailor’s shop(Factory, 1938, p. 5)

직공 가운데에는 또한 도제가 존재했다(Award for, 1937; History and, 1927). 도제는 양복 제작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배우기 위하여 숙련공 밑에서 일하는 직공으로서 연습생 또는 견습생이라고도 칭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Stunned to, 1923; Suit anniversary, 1943). 1920년대에 양복점수가 급증하면서 양복기술자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배출된 양복실습생들이 양복점의 인력 수요에 충당되었다고 한다(Kim, 1990). 도제들 중 일부는 양복실습생 과정 중에 있거나 양복실습생 과정을 졸업한 이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초 신문에서는 양복실습생 모집광고를 자주 볼 수 있는데 모집기관은 양행(洋行)양복부, 양복점, 양복실습소 등이었으며 교육기간은 3~6개월 등으로 다양했다(Bando, 1921; From six, 1922; Recruitment, 1922; Special recruitment, 1922).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시기의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검토하고 양복점의 판매물품의 종류와 특징을 고찰하며 양복의 생산 및 판매 주체들의 종류와 그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본 연구이다.

한국 근대 시기 양복과 양복점의 개념을 검토한 결과, 한국 근대의 양복은 남성복뿐만 아니라 여성복이나 아동복, 학생복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근대시기의 양복점은 ‘서양식의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또는 학생복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로 정의됨을 알 수 있었다.

한국 근대 시기 양복점의 판매 물품의 종류와 특징을 살펴본 결과, 1890년대 양복점에서는 정부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서구식 예복, 군복, 경찰복을 비롯하여 각 계절에 적합한 일반 양복과 넥타이, 셔츠 등의 부속 상품을 판매했음을 알 수 있었다. 1900~1910년대 양복점에서는 대례복이나 군복과 같은 정부 관복의 제작 납품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신사복, 외투, 학생복 등이 제작 판매되었다. 또한 신사복과 외투와 같은 일반 양복의 경우에는 주문복뿐만 아니라 기성복 판매가 병행되기 시작했으며 부인 양복 판매도 조금씩 행해지고 있었다. 1920년대 양복점에서 판매된 물품은 신사복과 외투 등의 일반 양복 위주였으나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 유형이 존재했으며 한 유형 내에서도 세부 상품이 많고 디자인과 소재에 따라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들이 판매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대량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기성 양복 시장의 확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1930년대 평화시기(1930~1937년) 양복점의 판매 물품은 192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신사복, 외투, 부인복, 학생복, 잡화 등이 계속 판매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양복이 더욱 확산되면서 지방에까지 ‘부인양복점’이 생겨나는 등 부인복 전용의 맞춤 양복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38년 이후 1945년 광복 이전까지는 전시 비상 경제 체제 하에서 양복점의 정상적 영업이 어려웠다. 소비자의 불안 심리로 인해 일시적 호황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양복점들은 수선일로 전환하거나 판매를 하더라도 일반 양복 보다는 관청 관리복, 국방복, 학생복, 작업복 등의 판매에 집중하였다.

한국 근대 시기 양복의 생산 및 판매 주체의 종류와 활동을 살펴본 결과, 경제 주체의 종류는 점주를 비롯하여 주임, 점원, 외교원, 직공, 도제 등 다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점주는 양복점의 경영자로서 ‘양복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양복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대별되었다. 점주들은 조합을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양복가격을 조절하거나 직공을 구인하는 등 각종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모색했다. 주임은 점주 바로 아래 또는 동급의 위상으로서 주로 양복기술을 가진 자가운데 가장 상급자, 즉 재단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점원은 양복점의 고용인으로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예컨대, 주문을 받기위해 양복지 견본을 들고 고객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나 양복대금을 수금하는 일, 가게에서 상품을 내어 와서 고객에게 보여주는 일, 고객과 대화를 나누며 응대하거나 고객의 치수를 재는 일, 가봉, 물품 납입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외교원은 점원의 일종으로서 고객들의 집을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양복 주문을 성사시키고 계약금을 받아오는 업무를 담당했다. 직공은 양복의 제작 업무를 책임진 생산자로서 숙련된 직공은 곧 양복의 품질이나 양복점의 명성과 직결되었으므로 양복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직공 가운데에는 도제가 존재했다. 도제는 양복 제작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배우기 위하여 숙련공 밑에서 일하는 직공으로서 연습생 또는 견습생이라고도 칭해졌다.

본 연구를 통해 근대 시기 양복점의 판매 물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일부 기성복 양복점들이 대량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상품 구색을 늘리고 상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양복 생산 및 판매 문화를 빠르게 변화시켜가는 정황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영세한 규모의 맞춤 양복점들도 고급 주문복 판매라는 차별화 전략을 통해 경쟁력 있는 시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반제품을 활용하여 빠른 시간 내에 주문 양복을 생산해내는 등 적극적으로 기성복 시장에 대응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본 연구 결과를 통해 근대 시기 양복의 생산 및 판매에 관여한 경제 주체들이 양복점 내외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며 근대 양복의 생산과 판매를 주도했으며 근대 양복 시장과 양복점 산업의 기초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의 분석 자료는 근대 시기에 출간된 신문 자료로서 출간 연대가 주로 1920~1930년대에 많이 치우친 편이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1910년대 이전 시기 양복점의 판매 물품, 생산 및 판매 주체의 활동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 연구의 한계점이다. 추후 추가 자료가 발굴되어 근대 초기의 내용이 더욱 보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B5A07042048).

References

  • A dynamic tailor’s shop focusing on repairing [主力을 修繕에다 集中元氣橫溢한 某洋服店], (1938, September, 10), Donga ilbo, p5.
  • A good young man, Mr. Yu Subok, of Bueun tailor’s shop [模範的靑年 扶恩洋服店 兪壽福氏], (1933, November, 12), Maeil sinbo, p5.
  • A suit rubber is caught at Bonjeong police station [洋服强奪犯 本町署에 被捉, (1936, January, 21), Donga ilbo, p2.
  • A tailor shop in downtown says, it will be little impact [別打擊 없을 걸-府內某洋服店 談], (1940, April, 20), Maeil sinbo, p3.
  • A tailor shop salesperson who embezzles 500 won[五百餘圓을 着服한 洋服店外交員], (1937, September, 14), Maeil sinbo, p3.
  • A wife who left four children at home [四男妹두고 出家한 人妻], (1935, April, 17), Donga ilbo, p2.
  • Advertisement [廣告], (1922, September, 11), Donga ilbo, p2.
  • Advertisement on move and new arrival of winter cloth [移轉及冬服地新着廣告], (1905, October, 11), Hwangseong sinmun, p3.
  • All kinds of suits, waistcoats and accessories [洋服죡기各種等附屬品], (1902, November, 1), Hwangseong sinmun, p3.
  • All of the army officer uniform [陸軍將校服一切], (1905, January, 28), Hwangseong sinmun, p4.
  • An invitation advertisement for tailors who graduated from America [米國得業裁縫師招聘廣告], (1904, December, 8), Hwangseong sinmun, p3.
  • Attention should be paid to buying so that there is a store feature [상점의 특장이 잇도록 사입에 주의가긴요], (1938, April, 23), Donga ilbo, p5.
  • Autumn big sales [秋季大賣出], (1925, September, 22), Donga ilbo, p1.
  • Award for a long-service person of the tailor shop [洋服店員의 勤續者表彰], (1937, November, 11), Maeil sinbo, p6.
  • Bando suit practice institute [半島洋服實習所], (1921, August, 8), Maeil sinbo, p4.
  • Be good! As gold mining order, a saving and patriotic service, goes into effect [壯! 節約報國 產金令이 實施되며], (1937, September, 19), Maeil sinbo, p2.
  • Beautiful young man who stole to make his wife happy [愛妻豪奢시기려고 窃盜한 美貌靑年], (1935, May, 10), Joseon jungang ilbo, p2.
  • Before the coat class(3) [외투강습을 앞두고(三)], (1934, November, 2), Donga ilbo, p4.
  • Beginning the western clothing making class [洋縫裁講習을 시작하며], (1934, April, 5), Donga ilbo, p6.
  • Big sales for white silk, linen and cotton [純白色綢緞布木大賣出], (1926, May, 2), Donga ilbo, p1.
  • Big sales for dress shirts and ties [와이샤쓰, 넥구다이大廉賣], (1926, April, 21), Donga ilbo, p6.
  • Big sales for ready-made publicity [레듸메드宣傳大賣出], (1930, October, 7), Donga ilbo, p7.
  • Big sales for ready-made winter clothes [旣成冬服大賣出], (1928, October, 1), Donga ilbo, p3.
  • Big sales for spring clothes [春服大廉賣], (1928, March, 16), Donga ilbo, p2.
  • Bosin tailor shop’s owner, Mr. Park Pallyong [普信洋服店主 朴八龍氏], (1934, June, 6), Maeil sinbo, p5.
  • Both sides are strong and hard [兩便依然强硬], (1926, December, 1), Donga ilbo, p5.
  • Bujeonok tailor shop’s workers suddenly strike [福田屋洋服店職工突然盟罷], (1931, April, 7), Maeil sinbo, p2.
  • Busan Modern History Museum, (2013), Departmentstore, dreamworld of modernity [백화점, 근대의 별천지], Busan, Republic of Korea, Busan Modern History Museum.
  • Celebration of Joseon Singung shrine establishment [奉祝朝鮮神宮鎭座祭], (1925, October, 12), Donga ilbo, p1.
  • Clerk of the tailor’s shop collects money and runs away with it [洋服店員 收金逃走], (1939, October, 19), Maeil sinbo, p3.
  • Coat [外套], (1934, January, 23), Donga ilbo, p3.
  • Complete ready-to-wear of Georgia [丁子屋의 完全한 레듸메-드], (1927, December, 20), Donga ilbo, p5.
  • Comport for the readers of Gangneung branch of this newspaper [本報江陵支局의 愛讀者 慰安], (1935, September, 28), Joseon Jungang ilbo, p3.
  • Conduct an economic propaganda on the transition of this industry and life improvement [斯界變遷生活改善에 經濟宣傳隨行], (1922, November, 20), Donga ilbo, p1.
  • Construction of major department store of Korea in Namdaemun street [南大門通에 朝鮮本位의 大百貨店建設], (1927, May, 1), Donga ilbo, p12.
  • Despotic Gakjeon tailor shop refuses 3 requests of workers [橫暴한 角田洋服店 職工要求 三件 拒絕], (1926, July, 31), Sidae ilbo, p2.
  • Discussion on remedies for small and medium-sized commerce and industry sponsored by this Economic Department(1) [本經濟部主催 中小商工業救濟策座談會(1)], (1932, July, 9), Donga ilbo, p8.
  • Donga ilbo newspaper reporter visits the province [東亞日報記者地方巡廻], (1925, February, 4), Donga ilbo, p5.
  • Embezzled salesperson [橫領外交員], (1923, September, 13), Donga ilbo, p3.
  • End-of-year big sales with giving gifts [景品附 歲末大賣出], (1928, December, 13), Donga ilbo, p7.
  • Faced with a profit decrease, it is covered by self-manufacturing [利幅减少에 直面되자 自家製造로 充當], (1938, December, 27), Donga ilbo, p6.
  • Factory Pilgrimage(16) [工場巡礼(16)], (1938, August, 31), Donga ilbo, p5.
  • Family counseling column [家庭顧問欄], (1939a, November, 1), Donga ilbo, p4.
  • Family counseling column [家庭顧問欄], (1939b, December, 2), Donga ilbo, p4.
  • Formation of the meeting of the tailor shop workers [洋服職工會發起], (1924, December, 29), Donga ilbo, p3.
  • Forty workers of Bujeon tailor shop submit a petition [富田洋服職工 四十餘名陳情], (1929, December, 18), Donga ilbo, p2.
  • Foundation of the association of the tailor’s shop [洋服店組合成立], (1921, April, 4), Donga ilbo, p4.
  • From six months’ practice [六個月實習으로], (1922, August, 9), Donga ilbo, p1.
  • Gathering [모임], (1922, October, 15), Donga ilbo, p3.
  • Gathering for a thousand dasu of undershirt [メリヤス千ダ—ス會], (1927, December, 22), Donga ilbo, p5.
  • Going back for sewing [재봉차발환], (1904, November, 29), Daehan maeil sinbo, p1.
  • Great good news of ladies and female students world [貴婦人女學生界의 一大喜消息], (1923, September, 25), Donga ilbo, p1.
  • Ha, W. H., (2006), The control economy policy and the price control in Korea during the end of Japan’s rule, Daedong Munhwa Yeongu [대동문화연구], 54, p121-152.
  • History and business development of Georgia [丁子屋의 沿革과 社業의 發展], (1927, May, 1), Donga ilbo, p12.
  • Hongseon, P., [洪善杓投] , (1932, January, 18), It’s been 50 years since the suits, now all of us wear, were imported [지금은 너나업시 다입는 양복이 수입된지 五十년], Donga ilbo, p4.
  • I graduated from an advanced making course of a foreign tailor’s shop [本人 等이 外國洋服店 大方家에셔 高等製造法을 卒業하고], (1903, November, 4), Hwangseong sinmun, p4.
  • I lost my seal in December of the lunar calendar [本人의 圖章을 陰 拾二月 分에 不知中셔 失 오니], (1909, January, 10), Daehan maeil sinbo, p3.
  • I served for six to seven years as Gungnaebu use [本人이 宮內府御用으로 六七年間服務 다가], (1909, November, 21), Daehan maeil sinbo, p3.
  • In this shop, with a new Western invented method [폐소에서 서양신발명한 법으로], (1908, September, 27), Daehan maeil sinbo, p3.
  • Jongno tailor's shop reservation product is offered at actual price [鍾路洋服店豫約品實價提供], (1929, October, 8), Donga ilbo, p6.
  • Joseon famine relief society [朝鮮饑饉救濟會], (1925, January, 1), Donga ilbo, p16.
  • Jusik company [쥬식회샤], (1896, September, 10), Dongnib sinmun, p3.
  • Kim, J. S., (1990), 100 years of Korean suit [한국양복 100년사], Seoul, Republic of Korea, Mirinae.
  • Kim, Y. A., (1934, November, 2), Before the coat class(3) [외투강습을 앞두고(三)], Donga ilbo, p4.
  • Kim, Y. H., (1987), A Study on the introduction and acceptance process of yangbok in the time of enlightment [개화기 양복도입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Unpublished doctoral dissertation), Sungkyunkwan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 Kobayasi, [小林忠太郞] , (1930, March, 3), Ladies’ wear and how to choose it(1) [부인양복과 선택하는법 (一)], Maeil sinbo, p4.
  • Life by job(1) [職業別로 본 그 生活相(一)], (1931, January, 1), Donga ilbo, p18.
  • Loss amount will be reduced [賠金將撥], (1904, May, 30), Hwangseong sinmun, p3.
  • Money paid to Chinese [中國人에게 주는 돈], (1924, April, 17), Donga ilbo, p2.
  •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n.d.), Standard Korean Language Dictionary [표준국어대사전], Retrieved from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 w.jsp.
  • New arrival of the latest trendy summer cloths [最新流行夏服次新着], (1905, May, 10), Hwangseong sinmun, p3.
  • New arrival of winter cloths [冬服地新荷着], (1923, September, 28), Donga ilbo, p1.
  • New arrival of winter cloths and production with cheap price [冬服地新荷着廉價調進], (1909, October, 2), Hwangseong sinmun, p3.
  • New clerk training method, one customer is under one responsibility [新店員訓練法一人의 客은 一人의 責任으로], (1938, February, 27), Donga ilbo, p5.
  • Ninety five workers of the tailor shop have a strike [洋 服職工九十五名同盟罷業], (1921, June, 24), Donga ilbo, p3.
  • Notice, (1897, August, 14), The Independent, p4.
  • Nowadays, regardless of sex [現今時代 男女 勿論 고], (1908, May, 26), Daehan maeil sinbo, p3.
  • Opening ceremony [開業披露], (1922, March, 26), Donga ilbo, p1.
  • Park, Y. C., (1975), A study on the change of yangbok in Korea: Focused on the suit [한국의 양복 변천 에 관한 연구: 신사복을 중심으로], (Unpublished master’s thesis), Hongik University, Republic of Korea.
  • Partnership lift advertisement [同業解除廣告], (1920, July, 22), Donga ilbo, p3.
  • Pilgrimage to commercial and industrial showrooms(5)/(10)/(11)/(13)/(14) [商工쇼윈도巡禮(5)/(10)/(11)/(13)/(14)], (1938, April, 6/12/13/16/19), Donga ilbo, p5/5/5/6/6.
  • Popular vote in Gangneung stores causes big impulses to commercial [江陵商店人氣投票 商界에 大衝動], (1935, June, 15), Donga ilbo, p3.
  • Practical summer clothes sale [實用夏服賣出], (1922, July, 29), Donga ilbo, p1.
  • Preview of department store is effective in retail store [百貨店의 內覽會 小賣店에도 有効], (1938, March, 8), Donga ilbo, p6.
  • Prices must fall [物價는 畢竟低落], (1922, September, 24), Donga ilbo, p3.
  • Prosecution for a suit swindler [洋服 詐欺犯 送局], (1941, November, 25), Donga ilbo, p2.
  • Pure wool business is on the rise as last su·fur prelude [最後의 스·퍼 前奏曲으로 純毛景氣가 擡頭], (1938, February, 25), Donga ilbo, p6.
  • Pure wool corning spreads before the era of blended fabric [混紡氾濫時代압두고 純毛織買占旺盛], (1938, March, 11), Maeil sinbo, p3.
  • Ready-made clothes [旣成服], (1925, March, 24), Donga ilbo, p3.
  • Ready-made clothes are the best in suits [洋服은 레디-메-드가 第一], (1927, April, 15), Donga ilbo, p5.
  • Reasonable management policy, rejecting salesperson and monthly sales [合理的經營方針 外交月賦販賣 排擊코], (1938, October, 13), Donga ilbo, p5.
  • Reception for Ilmin tailor shop workers [日民洋服職工披露], (1924, January, 19), Donga ilbo, p3.
  • Recruitment for a suit practice trainee [洋服實習生大募集], (1922, May, 8), Donga ilbo, p1.
  • Sales day of Georgia [丁子屋떰빙데], (1926, February, 2), Donga ilbo, p2.
  • Salesperson of the tailor’s shop embezzles money [洋服店外交가 代金橫領], (1932, February, 19), Jungang ilbo, p2.
  • Salesperson on night duty doubly cheats [야근外交員 二重으로 詐欺], (1938, March, 25), Donga ilbo, p2.
  • Salesperson thieves [外交員이 窃盜], (1934, February, 9), Donga ilbo, p2.
  • Settle the strike of the tailor shop workers [洋服職工盟罷觧决], (1929, December, 26), Donga ilbo, p2.
  • Sixty workers of Georgia tailor shop go on a strike [丁子洋服職工六十名罷業], (1929, March, 5), Donga ilbo, p2.
  • Someone who pretends to be a clerk of the tailor’s shop cheats and gets wealth [洋服店員假裝 詐欺取財行脚], (1937, April, 23), Maeil sinbo, p3.
  • Special recruitment for an intensive suit practice course [速成科洋服實習生特別募集], (1922, September, 18), Donga ilbo, p2.
  • Spring adornment is varied(4) [봄치장도 가지가지(四)], (1927, March, 22), Maeil sinbo, p4.
  • Spring big sales for suits and miscellaneous goods [春의 洋服雜貨大賣出], (1928, March, 22), Donga ilbo, p5.
  • Store management methods other than daily necessities(1) [日用品以外의 商店經營法(一)], (1937, November, 17), Donga ilbo, p5.
  • Store pilgrimage [廛房巡禮], (1929, January, 29), Maeil sinbo, p4.
  • Store reformation plan [店舖改革策], (1933, August, 20), Donga ilbo, p8.
  • Stunned to lose the child [失子하고 失神], (1923, January, 13), Donga ilbo, p3.
  • Suit anniversary event and commendation ceremony are a success [洋服記念日行事와 表彰式盛況], (1943, November, 18), Maeil sinbo, p4.
  • Suit of each country [各國洋服], (1901, September, 30), Hwangseong sinmun, p3.
  • Suit order [양복주문], (1908, June, 27), Daehan maeil sinbo, p2.
  • Summer big sales [盛夏大賣出], (1928, June, 17), Donga ilbo, p5.
  • Supreme white-ramie sales competition [極上白苧亷賣大會], (1927, June, 8), Donga ilbo, p5.
  • Tailors, (1897, March, 9), The Independent, p4.
  • The appearance of high school girls who won two consecutive times [兩次大會에 連戰連勝한 注目되는 高女의 陣容], (1926, September, 25), Donga ilbo, p2.
  • The association of the tailor’s shop [양복뎜조합], (1908, July, 28), Daehan maeil sinbo, p2.
  • The cold goes and the heat comes [寒來暑往], (1921, Nevember, 3), Donga ilbo, p1.
  • The other day I was on Jungno street [本人이 日前에 中路에셔], (1908, July, 28), Daehan maeil sinbo, p3.
  • The second discussion [第二回座談會], (1931, June, 28), Donga ilbo, p8.
  • The seriousness of the war and the review of business conditions(Final) [事變影響의 重大性과 營業狀態의 再檢討(完)], (1937, December, 17), Donga ilbo, p6.
  • The strike of Baekseok tailor shop’s workers expands [白石洋服工罷業擴大], (1930a, April, 28), Jungoe ilbo, p2.
  • The strike of Baekseok tailor shop’s workers is further expanded [白石洋服店罷業益擴大], (1930b, April, 30), Jungoe ilbo, p2.
  • The union commissioner coordinates the strike of Baekseok tailor shop’s workers [白石洋服工罷業 組合委員이 調停], (1930, April, 29), Jungoe ilbo, p2.
  • The union of the tailor shop workers has foundation conference [洋服職工組合創立總會開催], (1926, July, 23), Donga ilbo, p4.
  • Theft and embezzlement of a clerk of the tailor’s shop [洋服店員의 窃盜와 橫領], (1935, February, 8), Maeil sinbo, p5.
  • Theft from the tailor’s shop [洋服店에 窃盜], (1932, October, 27), Maeil sinbo, p7.
  • Thieves break into the street in Daegu at the end of the year [歲暮大邱街에 怪賊이 橫行侵入], (1936, January, 13), Maeil sinbo, p2.
  • This tailor shop opened last time [弊洋服店은 過般開業 ], (1902, January, 18), Hwangseong sinmun, p3.
  • This time this shop invites a tailor graduated from the West [本店에셔 今回에 西洋셔 卒業허온 裁縫師을 雇聘 야], (1905, July, 19), Hwangseong sinmun, p3.
  • This time this shop opens a suit store on the place described on the left [今番 獘廛에셔 左記之處에 洋服廛을 開設 와], (1904, October, 3), Hwangseong sinmun, p3.
  • To buy a suit cheaper(First)/(Second) [양복을 싸게 사자면(上)/(下)], (1937, October, 26/27), Donga ilbo, p3/3.
  • Today’s success is only due to patience [오늘에 이만한 成功도 오직 忍耐에 잇소], (1933, January, 7), Maeil sinbo, p7.
  • Trend news [流行되는消息], (1922, March, 27), Donga ilbo, p4.
  • Trendy cape [流行의 케—프], (1927, December, 12), Donga ilbo, p4.
  • Varying ladies’ and children’s clothing [따러 변하는 부인 아동복], (1935, March, 4), Donga ilbo, p4.
  • Warm heart of workers [職工들의 美情], (1924, February, 1), Donga ilbo, p3.
  • Wartime small industrial problems(16) [戰時中小工業問題(十六)], (1938, October, 4), Donga ilbo, p6.
  • We know there are several young men, (1897, January, 26), The Independent, p2.
  • Western clothes of autumn [深秋의 洋裝], (1925, October, 13), Donga ilbo, p2.
  • While I was in business with Wondeung Boksong [本人 等이 遠藤福松과 契約 야 營業 든 中], (1905, July, 19), Hwangseong sinmun, p3.
  • Winter clothes reservation [冬服豫約], (1927, September, 2), Donga ilbo, p2.
  • Winter preparation and price(4) [겨울쥰비와 시세(四)], (1932, October, 26), Donga ilbo, p5.
  • Wonyeok attire [員役服裝], (1908, March, 4), Daehan maeil sinbo, p2.
  • Wool and Western clothes goods under the price control [物價調節下에 毛織洋裝品], (1922, November, 30), Donga ilbo, p1.
  • Workers of Bukcheong tailor shop are upset [北靑洋服工動搖], (1932, February, 9), Maeil sinbo, p7.
  • Year-end sale of Georgia [丁子屋의 歲暮賣出], (1914, December, 16), Maeil sinbo, p2.
  • Young businessman Mr. Hong Gyeongseok [靑年實業家洪庚碩氏], (1932, November, 6), Donga ilbo, p4.
  • Yuentai tailor shop [源泰洋服店], (1897, August, 17), Dongnib sinmun, p4.

<Fig. 1>

<Fig. 1>
Advertisement of Jongno tailor’s shop(Western, 1925, p. 2)

<Fig. 2>

<Fig. 2>
Show window of Samil tailor’s shop(Pilgrimage(5), 1938, p. 5)

<Fig. 3>

<Fig. 3>
Sow window of Ross tailor dressmaker’s shop(Pilgrimage(10), 1938, p. 5)

<Fig. 4>

<Fig. 4>
Show window of Miyago dressmaker’s shop(Pilgrimage(11), 1938, p. 5)

<Fig. 5>

<Fig. 5>
Advertisement of Jusik Company(Jusik company, 1896, p. 3)

<Fig. 6>

<Fig. 6>
Mantle and coat worn over Hanbok, Korean traditional dress(Conduct an economic, 1922, p. 1)

<Fig. 7>

<Fig. 7>
Cape look(Trendy cape, 1927, p. 4)

<Fig. 8>

<Fig. 8>
Morning coat and sack coat displayed in the show window of Daegyeong tailor’s shop(Pilgrimage(14), 1938)

<Fig. 9>

<Fig. 9>
Workers of Seoul tailor’s shop(Factory, 1938, p. 5)